2017. 5. 8. 09:45ㆍ나의 이야기
성북동 성락원 담장을 끼고 오르면 보이는 선잠2길 언덕길에 있는 자치당 정원
개인소유의 주택같아 보였는데 나무로 둘러 쌓인 개방형 아름다운 정원인지라
들여다 보기엔 좋았습니다.
바로 옆에 경비실 건물이 있었으나 경비하는 사람이 없기에
정원으로 들어가서 앵글에 담아 보았습니다.
사실 이 부근의 단독 주택들은 세계 각국의 대사관저가 대부분으로 개중에는 서울에선
살만큼 산다는 사람들의 가옥으로 성북동 아방궁으로 불리워 지는 고급 주택들인지라
성벽같은 높은 담장과 철통같은 경비시스템으로 잘 알려진 곳 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렇게 개방형 정원을 만들어 이 근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 정원을
둘러보고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한 집주인의 고마움이 기억에 남습니다.
간송미술관 출입구 전경
휴관중을 알리는 표지판
경비실에서 출입을 제재하였으나 아쉬운 마음에 잠시
들어가서 찍어 본 간송미술관 전경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구 성북동.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 1966년 전형필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하였으며, 소장품은 전적,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상, 그림, 글씨, 부도, 석탑 등 다양합니다.
설립목적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정리․ 연구․ 전시하여,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찾고자 설립되었습니다.
연원 및 변천
일제강점기인 1938년 전형필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 華閣)에서 출발하였는데
보화각은 전형필 자신이 수집한 우리나라의 전적 및 고미술품과 국학 자료를 전시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서,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하였습니다.
1962년전형필이 사망하자 아들인 전성우(全晟雨)와 전영우(全暎雨)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
1966년간송미술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로 새롭게 발족하였습니다.
미술관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되어 있어 미술관은 미술품의 보전·전시 업무를,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사업을 맡고 있습니다.
현황
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
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합니다.
2011년 현재 『훈민정음』(국보 제70호)·「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제135호)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등록되었습니다.
전시회는 회화·서예·도예·서화로 나뉘어 매년 봄·가을 2주일씩 2회 개최되며,
이 밖의 상설 전시는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80여 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약 1천점의 수장품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1965년 가을부터 고미술품 및 전적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고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하였고,
1967년에는 수만 권의 도서 중 2천여 질의 한적(漢籍)을 정리하여
『간송문고한적목록(澗松文庫漢籍目錄)』을 간행하였습니다.
또한 수장품들을 모아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추사명품첩(秋史名品帖)
』·『겸재명품첩(謙齋名品帖)』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정원의 해학적인 호랑이상
왕릉이나 세도 양반가의 무덤가에 세워졌던 문신상
정원에 소담스럽게 핀 수국
경비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원이라도 돌아보면 안되냐고 문의를 하였지만,
야멸찬 경비의 거절에 아쉽게도 발길을 돌립니다.
일년에 두 번 특별전시 기간에만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에 이 간송미술관을
이 처럼 평시에 찾아 와 둘러볼 수는 없었기에 아쉽기만 합니다.
가급적 어렵더라도 상시 개방하는 구조로 변했으면 하는게 시민들의 마음이기에
상시 개방에 대한 재 검토가 이루워지기를 바래 봅니다.
간송미술관 앞 도로변
공사 중인 선잠단지(사적 제83호) 전경
선잠단지(先蠶壇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던 곳입니다.
면적 528평. 사적 제83호. 선잠단은 조선시대 역대왕비가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잠신으로 알려진 서릉씨를 배향하는 단(壇)을 쌓고 제사지내던 곳으로 이 단은 조선시대
1471년(성종 2)에 처음 쌓은 것으로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같게 하였으나
단의 남쪽에는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매년 3월에 거행하다가 1908년 7월선잠단은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져 현재 그 유지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뒤 이곳은 폐허화되어 한말에는 461평의 터전만이 남았으며, 1910년 이후에는
민유화(民有化)되었으나, 현재는 그 위치에 ‘선잠단지’라는 팻말이 세워지고
주변을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양잠(養蠶)의 기원은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선잠단을 쌓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친잠례(親蠶禮)가 왕비의 소임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였습니다.
선잠단지의 옛 전경
개인소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성락원 전경
성락원 출입문 전경
신선이 사는 도심 속 정원 성락원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인 동소문(혜화문)을 나서면 곧바로 맑은 성북천이 흐릅니다.
삼선교 아래를 흐르는 개울로 지금은 복개되어 차도로 바뀌었지만 이 시내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선잠단이 위치하고, 다시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락원이 있습니다.
의친왕이 35년 동안 사용했던 별장으로 별장이란 제2의 주택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사대부가 소유했던 별장은 별서라 불렀고 제왕의 별장은 별궁, 혹은 이궁이라 했으니
아마도 별궁이라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이 좌절된 후 평생 배일정신을 잃지 않고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았던
의친왕은 이곳에 머무르며 어떤 소회에 젖었을까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심상응(沈相應)이 지은 별서로 낙산 아래
계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계류가에 조성한 별서정원으로,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위치한다고 해서 쌍류동천이라 불렀습니다.
동천이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어휘로 심산유곡의 경치 좋은 곳에
붙여지는 명칭입니다.
성북동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계곡이 깊고 산수가 아름다워
옛날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려한 이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몸과 마음을 수양했다고 합니다.
성락원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별서정원으로는 비교적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고정원입니다.
옛 문헌과 그림, 지도를 보면 도성의 내부는 물론 근교에도
다수의 고정원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성 안에 자리했던 북촌의 옥호정을 비롯해 인왕산 계곡의 빼어난 동천은
모두 훼손되었으며, 도성 밖에 조성되었던 백석동천도 유구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과 함께 성락원은
서울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정원 유적이라 할 수 있답니다.
성락원의 내원 바위에는 ‘청산일조(靑山壹條)’라고 새겨져 있고, 각자된 시문 중에는
‘청산수첩(靑山數疊)’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소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여 있는 성락원 일대의 아름다운 산세를 표현한 글입니다.
지금은 주변의 산야가 모두 고급주택으로 점유되어 성락원은 담장 안의 정원이 되어 버렸지만,
쌍류동천이라 칭했던 신선이 사는 땅의 산천경개가 얼마나 청아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성락원은 동천으로의 진입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으로 계곡이 모두 도시화되어
골목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담장으로 구획된 그 안의 별장만을 감상할 수 있는데 성락원은 크게
세 곳의 소정원 구역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 등 자연 지형에 따라 조원된 구역으로 나누어 집니다.
성락원의 정문을 통해 정원으로 진입하면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이 전원으로 이곳에는
두 줄기의 계류가 하나로 모여 흘러내리는 계곡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계곡은 과거에 차도를 만드는 바람에 깊은 도랑처럼 되어 있어 전원으로서의
옛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차도를 폐쇄하고 도로를 보행로로 고치면서 고정원의 모습을 많이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곳 암벽에 쌍류동천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전원 공간은 정원의 진입부로 옛날에는 어렵게 계곡을 거슬러 올라와 성락원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을 통과하는 감동이 매우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쌍류동천 각자가 있는 전원의 입구에서 바라보면, 그 안쪽에 위치한 내원은
용두가산이 가로막아 밖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계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용두가산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신선의 경역인
성락원의 비경이 펼쳐집니다.
용두가산은 성락원의 내원을 아늑하게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해 만든 인공조산(人工造山)으로
이 위에는 고목으로 된 느티나무, 음나무, 참나무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성락원 안내표지판
성락원(城樂園)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원. 명승 제35호. 성락원 앞의 계류인 쌍류동천
안으로는 용두가산을 만들어 성락원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사적 제378호.
명승 제35호. 지정 면적 1만 4407㎡. 성락원은 뒤에 산등성이를 등지고 좌우에
청룡·백호의 산줄기가 벌려선 형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락원 입구에 들어서면 두 줄기 계류가 하나로 모이는 산문(山門) 같은 계곡이 있으며,
여기에 ‘雙流洞天(쌍류동천)’이라는 글자가 계류 암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쌍류동천 안으로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을 만들어 성락원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용두가산은 성낙원 내원(內園)을 아늑하게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해 만든
인공조산(人工造山)으로 200∼300년 된 느티나무·음나무·참나무 숲이 울창합니다.
내원에는 계류의 암벽 밑에 소(沼)를 조성하였는데 이 소는 장축이 16m, 단축이
약 12m이며, 물 깊이는 약 1.5m라고 합니다.
소의 주위는 자연암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졌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북쪽 암벽에는
인공으로 수로를 파고 3단의 폭포를 조성하였습니다.
제일 위의 폭포는 낙차가 15㎝로, 직경 30㎝, 깊이 15㎝의 둥근 석구(石臼: 돌절구)에 떨어지는데
중간폭포는 낙차가 30cm로 역시 같은 크기의 석구에 떨어딥니다.
제일 밑단의 폭포는 낙차가 150㎝로 가장 큰데, 직경 80㎝, 깊이 20㎝의 석구에 떨어졌다가
소 속으로 넘쳐 흘러들어 갑니다.
폭포로 떨어지는 3단의 물줄기는 생동감 있는 수경(水景)을 연출하고
고요한 계곡에 요란한 물소리를 냅니다.
이 폭포 옆 바위에 ‘靑山壹條(청산일조)’라는 전서체 각자가 있으며, 소의 서쪽 암벽에는
행서체의 ‘檣氷家 阮堂(장빙가 완당)’이 새겨져 있는데, 장빙가란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린
집이란 뜻으로 김정희(金正喜)가 썼다고 합니다.
이 장빙가 각자가 있는 암벽 위에 “影碧池 海生(영벽지 해생)”, “百泉會不流 爲沼碧闌頭
自吾得此水 少作江湖遊 癸卯五月 孫文鶴書(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부터 약간의 강호놀이를 하네. 계묘 5월 손문학 씀).”
이라는 각자가 있습니다.
영벽지란 세 글자는 초서체로 썼으며, 해생이란 호를 가진 사람이 오언시를 해서체로 쓴 것으로
계묘는 1843년(헌종 9)으로 추정되는데 이로써 성락원의 소의 명칭이 ‘영벽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벽지 각자 위의 바위에 전서체로 내리쓴 또 하나의 각자가 있는데,
원문은 “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盧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 싸여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 입니다.
영벽지 소 속에는 괴석 하나를 물 속에 배치하여 놓았으며, 이 영벽지 동쪽 언덕 위에
변형된 고가 한 채가 남아 있는데, 이 집은 원래 농막의 본채로 이강(李堈)이 살았다 합니다.
이 집에서 숲 속의 돌계단을 오르면 또 하나의 못[池]이 영백지 위에 있는데
못 동쪽에는 근래 지은 ‘송석정(松石亭)’이란 누(樓)가 있으며, 못 북쪽 계류가에
‘松石(송석)’이란 각자가 있어 원래 이 못가 바위 사이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못으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중간 중간에 작은 폭포를 이루기도 하며, 상류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집수하는 기능의 못이 하나 더 있는데 성락원은 산의 계류를 이용하여
상·중·하에 세 개의 연못을 만든 곳으로 성락원 내에는 좋은 샘물도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성락원 내원도
성락원 평면도
쌍류동천
청산일조
장빙가
겨울에 고드름이 달린 집이란 뜻으로 추사 김정희 필체
송석정
송석정 측면
석송
암튼 성락원이라는 명승이 개인적인 사유지가 된 연유에는 깊은 사유가
있었겠지만 현재로선 아쉽기만 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조속히 매입하여 이를 국민들의 품속으로 조속히
되돌려 줄 것을 간절히 요청 드립니다.
문화재는 혼자만의 사유물이라기보다는 여럿이 즐기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마음에 성락원 담장을 따라 선잠2길을 따라 올라가 봅니다.
북정마을과 대비되는 고급주택단지들 전경
높은 담벼락과 감시 카메라
이 부근 주택들은 세계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많은 탓에
호주대사관저 안내판도 바라다 보입니다.
아름다운 자치당 정원
자치당건물
아방궁 같은 단독 주택들로 마치 유럽의 고성처럼 돌담으로 높게 쌓아
일반인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ㅜㅜ
돌담 아래에 지하 차고가 3개씩 있는 집도 있어서 아마 이런 집들은 차에서 내리면
승강기로 본관 건물로 직행하도록 만든 구조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암튼 이 성북동의 빈부차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이러기에 좀산다는 마님들을 성북동 마님으로 표현하는 용어가
TV에 자주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ㅎ
주한 앙골라대사관저 전경
아프리카의 빈국 중 하나임에도 이렇게 호화로운 대사관저가
필요한지에 대하여선.....ㅎ
생각하기엔 달린 일이겠지만, 이런 것들도 그 나라를 현재를 가름지을 수 있는
척도란 생각이 듭니다.
최양업휴양관
최양업이란 신부는 제천에 있는 베른성지를 일으켜 세운 신부였다는 생각이......
성가정 입양원(천주교 시설)
성북동 부촌에서 바라다 본 북정마을 전경
체육시설인 배드민턴장
때까치
성북로 컬리티
다시 성북동 초입으로 내려와서 수연산방 위쪽 주택가 골목에 세워둔
애마를 찾아 삼청각으로 향합니다.
삼청각
1972년 준공되어 "7.4 공동성명" 남북적십자회담 만찬지였던 삼청각은
"남과 북".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의 하나됨을 알리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현재는 (재)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전통문화복합공간으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통해
품격있는 한국 전통의 멋과 맛을 경험하실 수 있는 국제적 관광명소입니다.
삼청각의 6개 한옥 : 일화당, 청천당, 유하정, 천추당, 취한당, 동백헌과 야외마당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또 한 세계인이 즐겨 찾는 한식의 원류 한식당과 차가 있는 정원 카페 다원에서도
고즈넉한 삼청각만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삼청각 담장 옆 홍련사의 다양한 석불들
삼청터널
삼청터널 옆의 홍련사 입구
서울시 소유 문화재단인지라 널널한 주차공간(주차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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