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3. 01:17ㆍ나의 이야기
겸암정(중요민속자료 제89호)
안동지방의 대표적 정자인 겸암정사에는 많은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겸암정사에는 사랑채와 강학공간의 역활을 하는 정자 그리고 살림을 담당하는
안채가 공존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구조를 지녔습니다.
정자의 역활이 공부하는 유생들의 생활을 보살펴 주면서 자연과 교감하며 마음을 딱고
도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해야 할까요.
겸암정사는 하회마을 화천(낙동강) 건너편 작은 산 봉오리인 부용대 서편 강물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정자를 지은 사람은 겸암 류운용선생으로 향리에서 자제들 훈도에 전념하고
부모 봉양에 힘써 오셨다고 전해져옵니다.
겸암은 15세에 스승인 퇴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힘썼으며 퇴계선생님께서
향리인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해 퇴계 또한 겸암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에 감복해 총애를 하셨다고 합니다.
겸암의 스승인 퇴계는 겸암이 29세가 되던 해에 화천(낙동강) 건너 부용대 서편에 정자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는 겸암을 위하여 주역의 겸괘에 형상하기를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겸임정"이라는 현판을 써주며
"그대가 새 집을 잘지었다는대 가서 같이 앉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해 아쉽네"라는
편지 글을 보내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겸암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합니다.
겸암정사로 들어가는 진입로
안채전경
정자 밑으로 흘러가는 화천(낙동강)전경
안채 내루 전경
ㅡ자형 8칸의 겹집인 정자 겸암정
앞 퇴부분을 다락집형으로 높여서 만든 것으로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조성한 후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습니다.
누하주와 누상주의 굵기는 비슷하며 지붕은 팔작 지붕에
홑처마로 지어 소박하다고 느껴집니다.
평면의 구성은 정사를 바라보면서 왼쪽으로부터 구들 놓은 2칸 통의 방,
그 다음 우물마루로 깐 대청 4칸을 가운데에 놓고 오른 편에 1칸 방과
그 앞에 1칸 마루를 배치해 전체 8칸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왼쪽 방에는 암수재(조용히 딱는 곳)란 현판을 걸고 오른쪽 방에는
강습재(강설하고 익히는 곳)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겸암정
겸암정이란 현판은 스승인 퇴계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겸암정사라는 현판은 원진해가 9세 때에 쓴 것이라고 전해져 옵니다.
이 현판은 선생의 6대손인 양진당 류영선생이 겸암정사를
중수할 때에 찾아서 걸었다고 합니다.
정자의 전면과 좌, 우측면은 쪽마루로 돌리고 계자 난간을 설치해 각 공간으로
출입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안전성도 고려하여 지은 것으로 바라다 보입니다.
마루에서 올려다보는 천정은 연등 천장의 양식을 따서 서까래와 대들보,종보,대공 등의
목재를 결구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각문 담장 너머로 바라 본 쉼터
이 담장은 일각문의 빗장이 처져 있는 까닭에 담장 너머로 바라다 볼수 밖에 없었는데
자연석 화강암 돌비에 새겨진 글자는 능파대로 바라다 보입니다.
서애 류성룡이 이 곳에 소나무 30여주를 심고는 후손들에게 전하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ㄱ자형 홀집인 안채
안채는 정자 뒤쪽에 자리잡아 정자의 경관을 헤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의 편액은 허수료로 살림집의 안채가 아니라 강당에 부수된 요사로
왕래하는 이들이 숙식을 할수 있도록 하였답니다.
평면이 ㄱ자형이고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인상이 당당하고 활달하게 바라 보이며
다듬은 자연석을 정갈하게 쌓아 올려 높은 죽담을 조성하고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았습니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평면의 구성은 왼편부터 부엌 1칸, 앞퇴가 있는 방이 2칸,
대청 2칸으로 구성하고 이어 2칸통의 건넛방, "ㄱ"자로 꺽이는 동쪽 날개에 2칸의
홑 겹방과 반 칸의 내루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반칸 크기의 내루는 기둥 밖으로 다시 반칸을 돌출시켜 결국 1칸의 크기인데
이 곳에도 난간을 만들어 마무리하였습니다.
이 구조가 안채의 특색으로 내루 처마에는 겸암정강수계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는데
강수계의 내용은
강도수덕(도리를 강론하고 덕을 딱는다),
강신수의(믿음을 강론하고 의리를 딱는다),
강척수의(친족의 도리를 강론하고 우의를 딱는다)입니다.
심학연원의 적통인 겸암 류운용은 목민관의 귀감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그의 아우 서애 류성룡과 함께 하남백숙이라고 불리워 졌다고 합니다.
겸암 류운용선생은 34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음직인 전함사별좌로 벼슬길에 나간 후
의금부도사와 인동현감을 지냈습니다.
이 겸암정사는 후손이 거주하는 사택으로 제가 이 곳을 찾았을 때에는 집주인이 외부 출타 중이라서
빈집이었기에 혼자서 돌아 보았습니다만, 이 곳을 찾는 내방객들을 상대로 간단한 차와
다과를 팔기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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