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1. 23:33ㆍ나의 이야기
하회 옥연정사 대문채에서 바라다 보이는 안채에 붙여 지어진 일각문 전경
서애 류성룡선생님이 학문을 위해 지은 정사인 옥연정사는 그가 지었던 원지정사가 마을 안에
있었던 탓에 아늑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유로 강건너 부용대 기슭에 새 터를
잡아 놓았으나 가세가 빈한하여 정사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탄홍스님이 그 뜻을 알고 재력을 부담하고 건축을 맡겠다고 자원하여 1576년(선조 9년)에
착공하여 10년만인 서애가 45세가 되던 해인 1586년(선조 19년)에 겨우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1605년(선조 38년) 낙동강 대홍수가 나서 하회의 삼칸 초옥을 잃고 이 곳에 은거하면서
임진난을 회고하며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서술하셨다고 합니다.
화천정사를 지나면서 바라다 보이는 화천(낙동강)과 아름드리 적송
광덕리에서 옥연정사로 가는 오솔길
오솔길가의 대숲
하회 옥연정사 대문채
서애 류성룡의 시비
하회 옥연정사 배치도
하회 옥연정사 대문채의 출입문
옥연정사 대문채의 출입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일각문
안채에 붙여 지어진 일각문 전경
안쪽에서 바라다 본 대문채의 출입문
안채(완심제) 전경: 정면4칸,측면 2칸의 겹집
안채(완심제)
안채의 마루는 감록헌으로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물
구비 바라보네란 시어에서 따왔다고 전해집니다.
별당채(원락제)와 안채(완심재) 전경
사랑채(세심재): 2칸통 대청을두고 좌우에 각기 1칸씩의 온돌방을 배열
별당채(원락제): 반칸규모의 툇간과 뒤편 좌측에 2칸통의 온돌방 우측에는 1칸 규모의 대청
원락제(별당채)는 서애 선생님께서 이 방에 기거를 하시면서 징비록을 서술한 곳 입니다.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란 뜻으로 원락제라고 하였는데 이 명칭은 논어 중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줄겁지 아니한가란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원락제의 2칸마루는 애오현으로 도연명의 시 나 또한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한
시어에서 따왔다고 전해집니다.
사랑채 전경과 수령이 400여년된 서애 류성룡이 심었다는 소나무
사랑채(세심재) 전경
세심재란 뜻은 마음을 딱고 씻는다란 뜻으로 옥연서당과는
잘 어울리는 뜻을 지녔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랑채(세심재)인 옥연서당 현판
옥연정사기
간죽문 전경
하회 옥연정사는 오른쪽으로부터 대문채,안채,별당채,사랑채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가옥의 구조에서는 대문채와 사랑채가 근접해 있는데 비하여
하회 옥연정사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사랑채쪽으로 출입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편 광덕마을 쪽에서 들어 올 경우 이용되는 대문채는 6칸 규모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화천(낙동강)전경
며칠 전에 내린 폭우로 화천(낙동강)의 물 색상은 황톳물로 변해버렸습니다.
하회마을과 부용대를 이어주는 나룻배 전경
간죽문 안에서 바라다 본 화천(낙동강)
옥잠화
안채(완심재)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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