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초의 선사 탄생지(신안 세달살기 2021.10.14)

2022. 2. 3. 22:25나의 이야기

 

초의 장의순 대선사를 기리는 곳, (초의선사 유적지)

 

초의(장의순) 대선사의 출생지인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그분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추모의 장을 마련한 곳입니다.

 

초의선사의 생가가 위치한 이곳에 생가복원, 추모각, 추모비,

유물전시관, 다도관 등이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10년(1786) 에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수행하면서 선 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특히 당시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으로서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으며 시, 서, 화에 능통하여

5절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등 당대 최고의 거유 석학들과

깊은 교류를 통하여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습니다.

 

1866년 80세에 입적하였으며, 저서로는 《초의 집(草衣集)》《선문 사변만 어(禪門四辨漫語)》

《이선 내의(二禪來義)》가 있습니다.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차서(茶書)인

《다신전(茶神傳)》이 있습니다.

 

다신전의 내용은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을 끓이는 법,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입니다.

 

 

차문화체험관

 

 

초의선사 생가

 

 

생가 내부 전경

 

 

다성사

 

 

다성사 내부 전경

 

 

좌측 건물은 명선관

 

 

기념전시관

 

 

일지암 초당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주 차를 보내 달라’고

조르는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찻값으로 글씨를 써서 보냈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차가 마시고 싶으면 제주에서 차를 구해 마시면 될 일입니다.

 

지금처럼 소포 부치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에 추사처럼 자존심 꼿꼿한 사람이 뭍에 사는,

그것도 가족도 아닌 친구에게 폐를 끼쳐 가며 번번이 아쉬운 부탁을 했다는 점이 이상하지요.

 

추사는 왜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했을까요?

 

초의선사는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립니다.

 

조선의 다경(茶經)으로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써서 조선 차의 우수성을 알렸고,

다도의 정신과 선(禪)이 하나라는 다선일미설(茶禪一味說)을 강조했습니다.

 

또 찻잎을 따서 덖고 우리고 마시는 법을 상세히 기록한

《다신전(茶神傳)》을 남겨 조선의 다도를 정립했지요.

 

초의선사가 다도의 길에 들어서고 다선 삼매(茶禪三昧)의 경지에

이른 데는 다산 정약용의 영향이 컸습니다.

 

차의 언덕을 의미하는 ‘다산(茶山)’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무척이나 차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차에 깊이 빠진 계기는 1801년부터 시작된 전남 강진에서의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식이 돼지고기로 화병을 다스렸다면 다산은 차로 화병과 속병을 다스린 것입니다.

 

다산도 처음에는 차를 받아 마시는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손수 제조해서 마시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1809년 다산초당으로 스물네 살의 젊은 승려가 학문의 배움을 얻고자 찾아옵니다.

 

다산은 그에게 유학뿐 아니라 제다법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초의선사와 다산의 인연은 다산의 큰아들 유산 정학연으로, 유산과의 인연은

추사 김정희로, 추사와의 인연은 당대의 지식인들과 사대부들에게로 이어집니다.

 

그 매개체가 바로 ‘차’였지요.

 

초의선사는 대흥사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차를 만들었는데 누구라도

초의가 만든 차, 즉 ‘초의차’를 마시면 매료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에 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차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만 차가 생산되고 중국 차가 최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초의선사가 《동다송》에서 우리 차의 우수성을 설명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추사가 제주 유배 중에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그토록 졸랐던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그만한 차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초의선사가 만든 초의차는 어떤 차였을까요. 초의차를 마신 후에 약효를 본

범해 선사가 초의선사가 차를 만드는 과정을 시로 남겼습니다.

 

곡우에 이제 막 날이 개어도
노란 싹 잎은 아직 펴지 않았네
빈 솥에 세심히 잘 볶아내
밀실에서 아주 잘 말리었구나
잣나무 그릇에 방원(方圓)으로 찍어 내어
대껍질로 꾸려 싼 다음 저장한다네
잘 간수해 바깥 기운을 단단히 막아
한 사발에 향기 가득 떠도는구나

- 범해 선사, 〈초의차〉

 

 

초의 선사는 뛰어난 시승(詩僧)이기도 하였는데 초의 스님의 시는 ‘맑고 심오하고 소순기를

벗었으며 담백하면서도 높은 뜻과 격조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선사의 시풍이 맑고 깨끗하며 그윽하다는 것은 불가(佛家) 한시의 주류적 시풍, 즉

언외 지지(言外之旨)를 강조한 직관주의 시학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심헌

 

 

초의 선사상(1786~1866)

 

또 초의선사는 특히 그림을 잘 그려 불화나 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 스님이 그렸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스님은 남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유를 길러 내기도 했습니다.

 

 

초의선사는 조선왕조의 승려이자 풀옷의 선승으로 알려진 초의 의순 선사가 태어난 곳은

이곳으로 의순은 15세 때 해남 대둔산 일지암으로 출가하였으며 차(茶)와 풀 그리고 자연을

섬기며 풀옷을 입었다고 하여서 법호를 초의(草衣)라고 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조선의 당대 인사들과 다과를 즐기며 덕담을 나누었고 불교 외에도 도교, 유교학에도 능통하여

여러 저서를 남기신 분입니다.

 

 

옹호백로정

 

 

차밭

 

 

녹차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