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7. 18:20ㆍ나의 이야기
이화원 곤명호 둘래길에서 바라다보는 불향각 전경
이화원 표지판
이화원 안내도
인수전(仁寿殿)
동궁문을 통해 들어오면 곧바로 궁전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 궁전구가 조성된 이유는 원명원과
거리가 가까워서 황제가 두 원림을 오가기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궁전구의 첫 번째 건물인 인수전은 황제가 조회를 열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옥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광서제를 수렴청정한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내부는 자금성의 황궁처럼 꾸몄지만,
대전 앞뜰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고 태호석으로 장식해서 원림 분위기를 살렸습니다.
대전 앞에 용과 봉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십칠공교(十七孔桥)
이화원 최대의 돌다리로 무지개처럼 생긴 아치형 다리로 길이가 150m에 달합니다.
동쪽 제방과 남호도를 연결하는데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장소라서
연인과 가족들로 북적이는 곳입니다.
난간에 500여 마리에 달하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각의 크기와
생김새가 달라서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동우
십칠공교에서 가까운 동쪽 제방에 동우(铜牛)가 있는데 1755년 비로 인해서
호수가 범람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동상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황제가 소의 형상을 만들어 홍수를 막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화원(颐和园)은 중국 청나라의 여름 궁전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황가원림입니다.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사용하면서 서호(西湖)라 불렀는데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 눈에 들면서 황실원림인 청의원(淸漪园)을 조성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원명원이 완공되었을 때 건륭제는 더 이상 국고를 낭비하면서까지 원림을
조성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스스로 어겼습니다.
1750년 어머니 황태후의 60세 생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청의원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1764년에
완공한 것으로 이화원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886년 서태후때의 일입니다.
폐허가 된 원명원을 복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태후가 해군 창설을 위해 마련된 예산중
은 2,400만 냥을 유용해 자신의 여름 궁전을 조성했습니다.
이곳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다고 하는데 청일전쟁의 패배를
무력한 해군 탓으로 보는 중국 입장에서 서태후는 개인적인 탐욕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한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반면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이화원은 ‘옛 중국인들이 건축에 품은 이상’을
여실이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습니다.
옛 중국인 관념 속 지상 낙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화원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부지의 4분의 3을
차지한 곤명호(昆明湖)를 비롯해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던 궁전 구역, 아름다운 누각, 우람하게
자란 고목, 관상용 태호석, 아치형 다리, 종교적인 건축물이 조화롭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황실원림으로
‘황실 정원 건축 박물관’이라고도 불립니다.
여행자들은 주로 동쪽의 동궁문(东宫门)과 북쪽의 북궁문(北宫门)을 통해 이화원으로
들어가는데 어느 곳을 통해 입장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저도 이 곳은 한.중 수교 바로 다음 해인 1985년에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여행에서도 정문격인 동궁문을 입장을 하여 관람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화원은 넓은 곳이다보니 여유롭게 산책하듯이 돌아보아야 제대로 된 이화원을
느낄 수가 있는데 패키지여행에서는 이 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 인지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개별 여행도 아니다보니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외에는.....ㅜㅜ
장랑(长廊)
궁전구를 벗어나 호수 구역으로 가는 길로 낙수당을 지나면
728m에 달하는 긴 복도가 나타납니다.
양쪽이 훤히 트인 누각식 복도는 들보가 아름답다. <홍루몽(紅樓夢)>, <서유기(西遊記)> 등
고전 소설 속 대표 장면과 동식물들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무려 14,000폭에 달하는데 장랑 밖으로 펼쳐진
곤명호를 바라보는 것도 일품입니다.
장랑
곤명호(昆明湖)
항저우의 서호를 닮은 이화원 최대의 호수로 호수의 면적은 220만㎡로,
이화원 총면적인 290만㎡의 4분의 3을 차지합니다.
이화원에 들어와서 곤명호를 처음 마주하면 바다처럼 거대한 모습에 입이
벌어지는데 호수의 둘레는 6.4km에 달합니다.
곤명호는 원래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이용하던 서호(西湖)를
건륭제가 확장 공사를 해 조성했습니다.
호수에서 나온 흙으로는 만수산을 더 높게 쌓았고 호수를 3개 수면으로 나누고
인공섬도 3개 만들었으며, 긴 제방을 쌓았습니다.
항저우 서호에 매료된 건륭제는 그곳에 있는 다리를 모방해서 6개의 다리를
제방과 연결시키고, 이름을 곤명호로 개명하였습니다.
곤명호(쿤밍호)는 2.2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인공호수로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7만 평방 미터의 공간에 궁과 정원 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이화원의
특징으로 이화원으로 바뀌기 이전의 이름은 청의원(淸漪園)입니다.
청안방(清晏舫)
서태후의 정치적 야욕을 상징하는 돌배로, 석방(石舫)이라고도 부르며
장랑의 서쪽 끝 곤명호에 떠있습니다.
대리석으로 조각해 만든 배의 길이가 36m에 달하며 배 위에는
역시 돌로 만든 2층 누각이 있습니다.
영원한 권력을 갖고 싶었던 서태후는 순자(荀子, BC 298~238)의 경고가 두려웠는데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水則覆舟)", 즉 물은 배를 띄울 수 있고, 뒤집어 가라앉게도
한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어떤 물결에도 뒤집혀지지 않는
돌배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돌이 물위에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4개의 지지대가
밑에서 돌배를 받치고 있습니다.
지지대가 붕괴되면 배는 언제든 가라앉기 마련인데 민심에 귀를 닫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청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불향각(佛香阁)
배운전 뒤로 만수산에 우뚝 솟아 있어, 이화원의 중심이자 나침판 역할을 하는데 1891년에
은화 78만 냥을 들여 지은 것으로, 이화원 내 최대 공사로 꼽히는 곳입니다.
밑에서 보면 황금색 유리기와가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산 위에 세워져 더 웅장해
보이는데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곤명호가 드넓게 펼쳐지고 원림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 옵니다.
배운전(排云殿)
만수산을 오르는 길목 정중앙에 위치한 배운전은 건륭제가
황태후 60세 생신을 맞이해 지은 황실 사찰입니다.
대보은연수사(大报恩延寿寺)라 불렸던 사찰군의 대웅보전에 해당하는데,
1860년 영 · 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했을 때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1886년 서태후가 사찰 대신 궁전건물을 짓고, 자신의 생일에 축하 인사를 하러
온 문무백관과 황족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내부에는 3개의 계단 위에 서태후가 앉았던 의자가 놓여 있는데 전시되어 있는 물품들은
그녀가 70세 생일날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곳 불향각은 이화원 입장권외에 별도의 티켓을 꿇고 들어와야하는데 저는 마침 중국 북경에
살고 있는 중국인 여자친구가 오늘 그의 딸과 함께 저를 찾아와서 단체를 이탈하여
그의 안내로 이화원과 불향각을 돌아 보았습니다.
제 중국인 여자 친구는 오랜 만에 저를 만난다고 외동 딸을 앞세워 여러가지 선물을
준비하여 저를 찾아왔기에 그가 가져 온 많은 선물들을 차에 실어놓고 이화원을 그의 안내로
돌아보았기에 입장권가격은 잘모르겠습니다.
중국인 여친은 이 곳을 상시 돌아볼 수 있는 회원권이 있던 것 같았고
불향각 입장권도 중국 여친이 표를 꿇어 주다보니.....ㅎ
딸래미도 안면이 있는지라 오랜 만에 보게 되어서 무척 반가웠답니다.
이 중국인 여자친구는 북경대 근처에 살고 있는 중국의 혁명 1세대의 2세로
그 의 부모님은 지금도 자금구 안에 현재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무남독녀라서 물려받을 수 있는 부모님의 집과 살고 있는
자택 가격만 합쳐도 무척 부자란 생각이 ......
사실 우리가 생각할 때 북경의 중심가에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살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겠지만,이 곳 베이징은 평양과 마찬 가지로 팔로군 출신의 원로세대나 현재 공산당에
가입된 신분이 확실한 시민들만 거주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탓에 북경의 중심가는 중국의 다른 도시와 또 다른 특별한 도시랍니다.
낙수당(乐寿堂)
서태후가 기거하던 침궁으로 앞에는 곤명호가 펼쳐지고, 뒤로는 만수산(万寿山)이 버티고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건륭제가 최초로 건립했던 건물은 함풍제 때 파괴되고, 1887년 서태후가
재건했습니다.
공개된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정면에 걸린 ‘만수무강(萬壽無疆)’ 넉 자가 적현
편액으로 서태후의 장수를 기원한 듯 합니다.
중국인 여친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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