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를 바꾼 시안사변의 무대 화청궁내의 오간청

2019. 7. 13. 23:36나의 이야기













시안사변시 장제스가 머물던 오간청 집무실 전경




시안 사건 또는 서안사건, 시안 사태, 시안 사변은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안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화청지 오간청’에 묵고 있던 장제스는

 새벽 총성을 듣고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잠옷 위에 헐렁한 긴 겉옷만을 걸치고 부랴부랴 신발도 찾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도주하는데 

 두 손은 황급히 산 위로 도망치다 긁혀 상처가 났고, 혹한에 덜덜 떨면서 틀니조차 빠뜨린 모습으로

 큰 바위 옆 움푹 들어간 곳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 발각됩니다. 


장쉐량의 부하 손명구 대위가 그에게 경례를 붙이자 총통의 첫마디는 “귀관이 내 동지라면

 나를 사살하고 모든 것을 끝내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그 말에 손 대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각하가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기를 요청할 뿐입니다."


 손 대위는 등을 돌린 채 장제스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 대신 제가 업어서 산 아래로 모시겠습니다.” 장제스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젊은 장교의 넓은 어깨 위에 업혔습니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

하인이 장제스의 구두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들은 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송차에 올라 시안으로 출발합니다. 



한편, 역모의 주동자인 동북군과 서북군, 공산당의 홍군은 ‘항일연합군’을 결성하고 모든 주요 도로와

 관공서를 장악함으로써 섬서성과 감숙성은 반란군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됩니다.


시안에서는 내전 중지와 구국항일을 지지하는 거리 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장제스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반역자 장제스의 처형을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면서,

군대 내의 분위기는 총통의 처형을 지지하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시안사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이 장제스의

처형을 요구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또한 이 호기를 이용해서 동북군 및 서북군과 연합하여 근거지를 대폭 확대시킨 다음

 남경정부에 도전할 것이라고 예측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는데 공산당은 시안사변의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했고,

 ‘장제스의 석방을 촉구’했으며, 심지어 ‘장제스가 다시 남경정부에 복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공산당은 장제스의 체포와는 무관했지만 이 문제를 결말짓는 데는 깊이 관여하였는데

 8개 항의 요구조건을 지지하고 ‘항일연합군사위원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내전 회피를 전제로 협상을 개시할 것과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평화회의를 소집해서

 일치단결한 항일투쟁 계획을 협의하자고 촉구했습니다. 


사태를 신속히 수습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주은래)가 시안으로 향해서 

시안에 도착한 건 17일 이었습니다.


한시가 급박한데 저우언라이가 늦게 도착한 이유는 말을 타고 왔었기 때문이라고하는데  

저우언라이는 구금되어 있는 장제스를 만나러 갔습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 과거 자신의 밑에서 일했고, 또 자신이 그의 목에 8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어 놓은 인물이었는데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장제스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자

 이내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장쉐량과 함께 차분히 현 국가적 위기에 대한 공산당의 입장,

내전 종식을 위한 공산당측의 제안 등을 설명하자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진지하게

 들었다고 합니다.


장제스가 급속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배경에는 구금된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에 대한 배반자는

 이곳 시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경정부에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 자신이 여기서 희생되면

다른 인물이 남경정부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초조함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여기서 장제스의 빛나는 정치력이 발휘되는데 장제스는 앞으로 더 이상 내전은

 없을 것이란 점을 개인적으로 보장을 합니다.


 그러나 내전 중지를 구두로만 약속했을 뿐 어떤 합의문에도 서명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피우는데

 남경정부의 총통으로서 ‘체면’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남경정부로 복귀한 이후를 대비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습니다.


총통으로서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입어서는 통치 행위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12월 25일 장제스의 아내인 송미령이 시안으로 왔고 그리고 당일 장제스는

 시안을 떠나 이튿날 무사히 난징에 도착합니다. 


남경정부로 귀환하던 날, 장제스는 또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행위를 합니다.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을 자신의 전용기 편으로 함께 남경으로 데리고 가서

 처벌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장쉐량은 군말 없이 따라 나섰고 장쉐량은 남경에 도착한 직후

 장제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받기 위해

 각하를 뒤따라 수도로 왔습니다.


” 장쉐량은 12월 23일 군사법정에서 10년의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집 밖에 나오지 못하는 가택 연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려 53 년하고도 6개월 동안 갇혀 지내야 했는데 그의 생은 모질고 질겨

 101살까지 장수했습니다.


남경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먼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무능과 총통으로서의

 태만을 고백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섬서성에 파견한 정부군에게 전원 철수를 명령합니다.


 이로써 내전을 방지하겠다는 공산당과의 약조를 이행한 셈이었지요.


그리고 관례에 따라 연거푸 세 차례나 총통직 사임을 표명합니다.


거듭되는 ‘사임과 반려’의 과정에서 8개 조항을 하나씩 하나씩 착실히 이행해 나갑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의 역사, 대륙의 정치를 보면 이해하기가 어렵고 때로는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좁은 한반도에서 아옹다옹하는 정치권을 바라보다가 중국을 바라보면

 우선 중국인의 지혜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홍문지연’, ‘시안사변’,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와 중국인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될 징검다리입니다.


 혹자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중국인은 ‘땅은 넓고 사람은 많다’라고 합니다.


뛰어난 개인보다 오랜 세월 역사 속에서 그들은 구르고 굴러 다듬어진 집단의 지혜가

수 많은 한족들에게 더욱 중요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화청궁 안내지도
























화청궁 유물박물관을 돌아본 후 화청궁내를 돌아 봅니다.


본래 화청궁의 1/3 만 복원되었는데도 워낙 넓은 지역이다보니 .......ㅜㅜ

























귀비천
























귀비천으로 들어가는 온천수 공급처인 모양이지만 덮게로 덮여 있는 탓에......ㅎ





























수문당















 













왼쪽의 건물이 오간청을 기리키는 안내판 전경

























오간청 건물앞의 연지




























 오간청의 리셉션 룸 출입문 전경





장안 동쪽 여산 기슭에 역대 제황들이 행궁을 짓고 온천욕을 즐기던 ‘화청지’

당 현종 때 대규모 확장 공사를 한 뒤부터 이 곳을 ‘화청궁’이라고 칭했습니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화청지에서 오른쪽 위쪽으로 가면 시안사변의 현장인 ‘오간청’이 나옵니다.


 깨어진 유리창과 벽면 곳곳에 파인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채

 묵묵히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 관광객들은 화청지에 오면 현종과 양귀비가 뜨거운 사랑을 나눈 장소로만

 알고 있지 이곳이 시안사변의 역사적 현장인 줄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칩니다.


오간청에서 뒷길로 500미터 정도 산을 오르면 장제스가 숨어 있다가 발각된 바위 근처에

 이날의 일을 기념하기 위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일행들이 안마를 받는 시간을 이용하여 이 곳을 다시 들어왔다고 먼저 올린 글에서

 말씀을 드렸는데 시간 관계상 그 곳까지 돌아 보기엔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기에

그 정자에 관해서는 글로만 알려드립니다.


 정자 이름은 ‘병간정’, ‘병간’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무력을 행사해 간언한다는 의미로

 이 날의 병간을 중국역사는 시안사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장제스가 묵었던 거실 전경


























시안사변때 장제스가 머물던 숙소 전경





12월 7일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습니다.


동북군 지휘관들은 다시한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楊虎城)장군

 휘하의 4만 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습니다.


 12월 9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자식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하여 더 이상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전 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습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藍衣社)는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까지 작성 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찬성하는 장군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12월11일밤 10시 장쉐량은 동북군, 서북군의 합동사단장회의를 소집하고

 본격적인 반란에 돌입하였습니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을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지고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젊은 원수로 알려진 장쉐량(장학량)은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의 군벌인 장쭤린(장작림)의 장남으로

 1928년 장쭤린이 죽자 그 위치를 물려받은 장쉐량은 만주의 젊은 독재자 이자 군벌로 위세를 떨쳤는데

 1931년 9월 본격적인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근거지를 잃은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홍군과의 국공내전의 부사령관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정으로 옌안을 수도로하여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홍군과의

 의미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습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돌아와 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좌익의 영향을 받았고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의 난징정부의 "선 통일, 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장쉐량은 만주시절부터 내려오던 동북군 장교단을 젊고 진보적인 좌파로

 채우고 공산군과의 접촉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접촉은 장제스의 난징정부에는 철저한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으로 시안사변으로 당시 열세에 있던,

 중국 공산당은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이 중국 내륙에서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어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중국 대륙을 통치하게 되었고,

 기존의 중화민국정부는 중국공산당에 쫓겨 타이완으로 후퇴를 합니다.


그런 의미로 되돌아본다면 중국의 시안사변은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뀐

시점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간청 바로 앞의 연못과 회랑들


























시안의 시목인 석류나무에 석류꽃이 오간청 위에 곱게 피어 중국 근대 역사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듯 어루만져 줍니다.  

























많은 거처와 정자가 세워져 있는화청궁 뒷산인 리산 하부


※ 리산 정상부까지는 케불카도 운행되고 있습니다.







































워낙 넓은 지역인지라 화청궁 전체를 돌아보기엔 무리란 생각에 일행들이 맛사지를 끝낼 시간에

 맞춰 서둘러 맛사지 업소로 회귀를 합니다. ㅎ 






















장한광장 식당가의 채선당에서 내려다 본 화청궁 앞 식당가  골목 전경



 맛사지를 끝낸 일행들과 다시 조우를 한 후 걸어서 장한광장의

 식당가에 있는 채선당으로 향합니다.


야간에 화청지에서 공연하는 장한가무쇼를 보기위하여 조금 이른 저녁을

 화청궁에서 가까운 채선당에서 해결합니다.


한국의 레스토랑 상호인 채선당은 이 곳에선 회전식 초밥집같은 구조로 1인 신선로같은 용기에

 회전식으로 야채와 각종 육류 그리고 면류를 골라서 샤브식으로 꿇여 먹도록 운영이 되고

 있었는데 참 편리했다는 생각이.....


사실 음식은 샤브식 같아보이기도 하였지만 느낌은 화궈같다는 생각이......ㅎ
























장한광장 식당가의 조형물 전경

























장한광장 주변의 식당가에서 전통중국 악기를 연주하는 중국인



이제 장한가무쇼를 보러 야간에 또 다시 그러니 3번째 화청궁으로 향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