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사후 세계를 지키는 병사들.1(병마용박물관 1호와 3호 2019.5.22)

2019. 6. 26. 23:16나의 이야기












세계문화유산으로 진시황의 사후 세계를 지키는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병마용 박물관(兵马俑博物馆)제1호갱 전경






















진시황의 지하궁전 모형을 돌아본 후 찾아 온 병마용박물관 전경



































병마용박물관 제1호갱 전경

























 병마용 제1호 갱 전경  


          

2호 갱에서 남쪽으로 20m 떨어져 있는데 면적이 14,260㎡나 되어서

 거대한 실내 운동장을 방불케 합니다.


1,050여 명의 병사와 24마리 말이 네 집단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맨 앞에 210여 점의 테라코타 병사들이 전위 부대를 형성하고, 그 바로 뒤에 11개 집단으로

 나뉜 38열의 병사들은 보병과 마차나 말을 끌던 차부입니다.


병사들은 대부분 갑옷 차림으로 한 손에 무기를 쥔 자세인데, 실제로 대량의 청동 검과

 창촉이 병사들 발밑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나무로 만든 손잡이 부분이 썩어 없어지면서

 바닥에 흩어진 것입니다.


 1호 갱 지하에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병마용

5,000여 점이 잠들어 있습니다.


원래 병마용은 발굴 당시에 머리는 검은색, 얼굴은 연한 황색, 갑옷은 청색 등으로

 채색된 상태였는데,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색상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진시황 그는 누구인가?

정(政, 미래의 시황제)은 기원전 259년, 전쟁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전국시대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어 거의 언제나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인 진나라의 장양왕이었고, 모친인 조희는 장양왕을 후원한 부유한 상인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습니다.


후에 일부 역사가들은 시황제가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그의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면은 초기 진나라 군주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전부터 쓰던 제왕이라는 호칭대신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신이라는 의미인 황제(皇帝)에, 최초(始)라는 뜻을 붙여 시황제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 후 황제의 이름은 이세황제입니다.


진은 원래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나 차츰 국력을 길러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였습니다.


 이 후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펴 여러 지역을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어 갔습니다(기원전 221년).


 중국의 영어 표기인 차이나(China)도 진(Chin)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진나라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다스리던 제후들이 세력을 잃고, 각 지방은 황제가 임명한 관리들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또 지방마다 달랐던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이후에도 북방의 유목민족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시황제는 이들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만들었던 성들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습니다.


지금은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지만, 이는 당시 진나라 사람들이 10여 년간 30만 명 이상 동원되는 힘든 고통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시황제를 폭군적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사상 통일책이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수거되고 소각된 <분서(焚書)사건>이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 당하는 이른바 <갱유(坑儒)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독재적 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러 2차 순찰에 나섰다가 천하를 통일한 지 11년 뒤인 49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후 진나라는 급격한 통일정책과 가혹한 강압정치와 만리장성, 아방궁과 같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의 큰 발발을 불러 일으켜 멸망하게 됩니다.


중국을 통일한 지 겨우 1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병마용 파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2,200년 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진시황릉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지요.


 병마용이 묻혀 있던 갱은 진시황릉에 딸린 180개 부장 갱의 일부로, 진시황릉의 가장 바깥

 둘레에 있는 지하 갱에서 흙으로 구운 병마용이 대량 출토되었습니다.


병마용은 진시황의 사후 세계를 지키는 병사들로 놀랍게도 출토된 병사들 얼굴이

 저마다 다르고, 실제 사람처럼 키가 170~180cm에 달했습니다.


예술성으로 따져도 현실주의를 완벽하게 따른 걸작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발굴된 1호 갱에만 6,000점의 병마용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중 완벽하게

 복원을 마친 1,050여 점의 병사가 발견 당시의 대형으로 서 있습니다.


2년 뒤인 1976년에 2호와 3호 갱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병마용 갱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병마용 박물관을 관람할 때 통상적인 관람 순서인 발굴된 순서가 아닌 1호 → 3호 → 2호 갱

 순서로 둘러보았는데 그 이유는 관람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했었기 때문입니다.









































 병마용터에 쓴 주민의 묘자리 흔적



병마용터에 묘를 쓴 주민은 농부가 병마용을 발견하기 전 이 묘를 썼던 것으로 여겨져 

농부보다 먼저 병마용의 실체를 알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 묘자리를 쓴 주민이

이를 감추었던 까닭은 유적 발굴로 조상들의 묘자리가 훼손되는 막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8대 경이"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진시황 친위군단의 강력한 위용은 물론, 당시의 군사편제 ·갑옷 ·무기 등의

 연구에도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병마용 박물관 제3호갱으로 이동하는 전경
























병마용박물관 제3호갱 전경
























병마용 제2호 갱  전경 

          

병사들의 움직임이 3개의 갱 중 가장 역동적인 곳으로 기병은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을 몰고,

 한쪽 무릎을 꿇은 궁수가 전방에 포진했습니다.


전차는 오른쪽 측면에, 기병은 왼편을 맡았고 중앙에는 보병이

 직사각형 대형으로 분산돼 있습니다.

























정작 시황제의 무덤은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둔덕 바로 아래 지하궁전에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면 진시황릉의 구조가 하나의 거대한 지하도시로 전체 면적이

 60여 만평에 달하고, 지하 4층의 거대한 궁전으로 되어 있으며, 묘역 안팎에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쌓아 당시 도읍지인 장안(長安)과 같이 외성곽 길이만도 12㎞에 달한다는

 발표로 한마디로 진시황릉은 '거대한 묘역도시'인 셈입니다.






















일반 황릉과는 달리 황후와 합장하지 않은 것도 특이한데 황후를 합장하지 않고

진시황 단독 묘를 쓴것은 당시 ‘황제권력은 한없이 높다’는 ‘황권지고무상관

(皇權至高無上觀)’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런 진시황릉에 대한 발굴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러나 현재의 발굴 기술로는

 원형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는 중국 정부의 판단 때문에 대대적인 발굴은

아직도 미뤄지는 형편에 있습니다.


완전한 발굴로 그 실체를 밝히기 까지는 앞으로도 몇 세대의 세월이

 필요하다는게 고고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진시황의 무덤은 보호를 위하여 자동으로 발사되는 화살을 만들어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도록 했으며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

중국 최고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진시황릉에 관한 설명 중 일부분입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이 책이 완성되기 약 110년 전인 BC 210년 여름에

 지방 순시를 나갔다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더운 여름이고 지방이라 시신이 부패돼 그의 무덤에는 백골만

 안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의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바로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수은’으로 그들은 수은을 이용한

 과학적인 방부 기술이 당시에도 사용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휘발성이 매우 강한 수은 기체는 인체에 치명적이어서 도굴꾼의 침입을 방지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데 진시황의 무덤 안에 수은이 흐르는 강을 만든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병마용의 흥미로운 사실은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은 물론 수많은 보병들의 얼굴 표정 및

 갑옷과 머리 모양, 자세 등이 모두 다르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병사들이 각각의 실제 사람을 모델 삼아 제작됐는지 아니면 장인들이

 보통 사람의 얼굴 특징을 짐작해 제작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및 중국 진시황릉 박물관 공동 연구팀이

 2014년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병마용갱의 모든 토기 병사들은 실제 군인을 

모델로 삼아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연구팀이 이 같은 사실을 밝히기 위해 주목한 신체 부위는 바로 귀였습니다.


인간의 귀는 사람의 지문처럼 사이즈와 형태, 각도 등이 사람마다 각각 독특한 모양을 지니는데

  연구팀은 총 30점의 토기 병사들을 3D 기술로 모형 제작해 비교한 결과, 병사들의 귀 모양이

 각각 달라 이는 실제 사람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즉위하자마자

 여산에 치산 공사를 벌였습니다.


지하수를 세 번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녹인 구리를 부어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했습니다.


 능 안에는 궁전과 누각을 세웠고, 천장에는 하늘의 별과 달의 천문도를 보석으로

 장식했으며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를 재현하였습니다.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으로 발사되는 기계장치가 된 쇠뇌를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되도록 했습니다.


진시황의 지하궁은 기계를 이용해 수은이 흐르게 하여 온갖 하천과 강, 바다를 만들고,

 인어기름(도롱뇽 기름으로 추정하고 있다)으로 초를 만들어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후에 항우가 이곳을 파괴했을 때 30만 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그 보물들을 날랐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겠습니다.


진시황은 무덤의 비밀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 매장 직후 능 안의 모든 문을 잠가서 매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실제 무덤 주변의 수은 함량치가 다른 곳보다 월등히 높게 탐지되는 것으로

 보아 책 내용의 대부분이 사실일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진시황릉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