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 15:34ㆍ나의 이야기
천안문(天安门)전경
명 · 청대에는 자금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1417년 자금성의 정문을 짓고 승천문(承天门)이라 불렀습니다.
1651년 청나라가 성문을 재건하면서 ‘세상을 편안하게 다스리겠다’는
염원을 담아 ‘천안문’으로 개명했습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이 천안문 성루에 올라
중화 인민 공화국 탄생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옛 궁전의 정문이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장소’로 변모했는데 정면에 걸린
마오쩌둥 초상화는 제작 기간이 1년이나 소요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천안문에는 총 5개의 문이 있는데 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운데 가장 큰 문은 황제만 이용할 수 있었는데, 황후가 시집올 때, 과거 1~3등 급제자가
처음 입궐할 때 이 문을 통과하는 영예를 누렸다고 합니다.
과거시험이 있는 날 응시생들은 동쪽의 장안좌문(长安左门)을 통해 들어갔고,
시험 결과 역시 동쪽 성문 밖에 공지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서 ‘용문(龙门)’이라 했는데
등용문(登龙门)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수교한 그 이듬 해인 1995년도에 북경으로 향하는 직항기가 없던 시절 일본을 돌아 본후
하네다공항에서 이란 비행기편으로 북경으로 향했던지라 이 번 여행은 추억을 회상하는
여행이었기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23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북경은 많이도 변했더군요.
제가 북경을 처음으로 찾았을 때에는 우리보다 20여년 정도는 뒤쳐졌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무척 발전을 한 탓에......ㅜㅜ
북경관광안내도
마오 주석 기념당(毛主席纪念堂)전경
1976년 9월 9일에 사망한 마오쩌둥을 영구 안치한 묘소로
1977년 9월 9일에 개관했습니다.
높이 33.6m,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이뤄진 건물인데, 전국 각지에서 마오쩌둥을
알현하러 온 사람들로 줄이 길게 이어집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고, 들어가는 절차가 까다롭고, 안에 들어가서는
고압적인 공안들 태도에 기분이 언짢아지기 십상인 곳입니다.
기념당에 들어서면 3.4m 높이의 마오쩌둥 대리석상이 먼저 보이고, 첨앙청(瞻仰厅)의
수정으로 만든 관 속에 마오쩌둥이 방부 처리되어 영면해 있습니다.
인민대회당(Grreat Hall of the People, 人民大会堂)전경
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중국 정치의 중심지로
국빈이 방문하면 연회장으로도 사용합니다.
천안문 광장 서쪽에 총면적 171.80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일정 인원이 형성되면
안내자를 따라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중국"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이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돌아 볼만은 합니다.
단, 사진기 휴대는 가능하지만 다른 짐은 들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휴대품 보관소에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고 짐을 맡겨야 합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1만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만인대례당(万人大礼堂)과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청(宴会厅)을 비롯해 300여 개의 방과 회의실이 있습니다.
그중 만인대례당은 중국의 주요 정책들이 결정되는 장소로, 우리 나라 국회의사당과
같은 역할을 허는 곳으로 이곳의 천장이 관람 포인트라고 합니다.
중앙에 붉은 별이 반짝이는데 둥근 천장이 우주고 가운데 붉은 별이 공산당을 상징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전국의 각 성(省)과 자치구, 직할시 및 특별행정구를 포함해
‘34개 지역’을 상징하는 ‘34개의 방’입니다.
각 지역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물과 각종 공예품으로 꾸몄는데
예를 들면 티베트관에는 탕카, 신장위구르자치구관에는 장인이 만든 카펫이 깔려 있습니다.
국가기념일을 앞두고 꽃 단장 중에 있는 천안문 광장(Tiananmen Square, 天安门广场)
중국 근현대사의 중심 무대인 천안문 광장은 총 면적이 44만㎡로,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 광장의 3배, 우리나라 여의도 공원 면적의 2배에 달합니다.
100만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중국 근현대사의 기원을 여는
핵심적인 일들이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1919년 신문화 운동인 5.4운동을 시작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1966년 중국을 10년간 집단적 광기로 몰아 넣었던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집결,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명 · 청대에는 천안문 광장 일대가 내성(內城)에 속해서, 자금성 바로 바깥의
궁정 광장으로 활용되었다는 걸 떠올리면 흥미롭습니다.
신중국의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마오쩌둥은 구시대의 자취를 없애고자 성벽과 성문,
옛 관청 등을 허물고 천안문 광장이라는 열린 공간을 조성했는데 이로써 베이징의 중심은
과거보다 약간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현재 광장은 남북 길이가 880m, 동서 너비가 500m에 달합니다.
광장 사방에 배치된 건축물 구도를 들여다보면 과거의 유물이 가득한 중국국가박물관이
현재의 중국을 이끌어 가는 인민대회당과 마주 보며 서 있습니다.
건국기념일이면 주석이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는 천안문(天安门)과 과거의 지도자가
안치되어 있는 마오 주석 기념관, 인민 영웅 기념비가 마주 바라보는 구조로
현재와 과거가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듯 합니다.
광장 맨 앞에 해당하는 국기게양대(升旗台)는 이색적인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명소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맞춰서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거행하는데, 담당 군인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내딛는 발걸음과 근엄한 표정이 인상적입니다.
그 광경을 보려고 중국인들은 1~2시간 전부터
국기게양대 앞에서 장사진을 친다고 합니다.
천안문 전경
중국 국가 박물관(National Museum of China, 中国国家博物馆) 전경
천안문광장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ㅎ
천안문 전경
오문 전경
고궁박물원(오문) 입구
하늘에서 바라다 본 고궁(자금성) 전경
고궁(자금성)안내도
오문 전경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은 궁궐 문으로서는 세계 최대 크기라고 합니다.
가운데 누각에 황제의 옥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황제는
이 누각에 올라 포로를 받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해마다 이 곳에서 새 역법을 알리고, 군대의 사열식을 지켜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문전경
자금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오문(午門)으로 전체 모습이 주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과
유사하다는 뜻으로 ‘오봉루(五鳳樓)’라고도 합니다.
오문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그중 황제가 사용했던 가운데 문은
현재도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황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오문 앞에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도보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또한, 출입문의 역할 이외에도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거나 전쟁 포로를 바치는
의식 등을 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는 고궁 박물원의 입장문입니다.
오문 전경
뒤돌아 본 단문 전경
단문(端門)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으로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고 외형은 천안문과 똑같습니다.
황제가 조회시, 만조백관들이 이 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이 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문의 빗장
오문안에서 바라다 본 단문
오문에서 태화문을 배경으로
고궁(자금성)의 태화문 전경
한자로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이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궁궐, 자금성은 오랫동안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지요.
지금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이라고 부릅니다.
자그마치 5세기 넘게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입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두 왕조 시대, 거대한 나라 중국의 중심지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생각했지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넓은 공간에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 하나가 중국 고대 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자금성은 과거 중국 왕조가 얼마나 눈부신 문화를 이루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입니다.
태화문 전경
태화전은 자금성의 상징으로, 궁궐의 중심 건물로 황제의 즉위식이 이 곳에서 거행되었으며,
생일 잔치나 중요한 명령 발표, 외국 사신과의 만남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2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2층 건물로, 지붕의 기와도 내부도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하여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새황제가 자리에 오르면 이 곳에 앉아 신하들의 인사를 받았고, 최고의 정치 명령을
내리는 의식도 모두 이 옥좌에 올라서 행하였습니다.
오문 전경
고궁(자금성)의 태화전 전경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 명·청대에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라고 부르던 24명의 황제가 살던 궁궐로
"자금(紫禁)"이라는 이름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1406년에 명나라 영락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하였는데, 전국에서 건축 재료를 모아 오는
데만도 12년이 걸렸고, 3년에 걸쳐 약 50만 명의 인부가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동서로 750미터, 남북으로 960미터 길이에 총면적이 72만 평방미터에 달하며 또한 10미터
높이의 성곽과 깊이 6미터, 너비 52미터의 해자가 있어 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자금성에는 무려 9,999개의 방이 있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황제의 아들이 매일 방을 바꿔 가며 잔다고 해도 한 바퀴 돌아 태어난 방에
이르면 27세가 되고, 두 바퀴를 돌고 나면 54세로 죽음을 준비할 때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태화전의 사자상
좌우측에서 태화문을 지키고 있는 사자상은 명나라 때 것으로 오른쪽에서 여의주를
누르고 있는 것이 수컷, 왼쪽에서 새끼에게 젖을 주고 있는 것이 암컷입니다.
왼쪽의 암컷 사자상은 마치 새끼를 못살게 구는 것 같지만, 옛 중국인들은
사자의 발가락에서 젖이 나온다고 여겼답니다.
이 한 쌍의 사자는 황제가 지나는 가운데 통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태화문 천장도 주목해야 하는데 격자 무늬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태화전 전경
외조는 황제가 정무를 보던 구역으로 자금성 남부를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물은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삼대전(三大殿)입니다.
태화전(타이허뎬)은 황제가 관료들을 만나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으로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금란전(金棄殿)이라고도 불립니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는 중국 최대의 목조 건물로 외부는 웅장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며
실내는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과 구조가 특징입니다.
건물 전체에 다양한 상징물이 조각되어 있으며 특히 천장과 옥좌, 들보 등 많은 곳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태화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태화문(太和門)이라 하며 자금성 정문인
오문을 지나 태화전 전면에 있습니다.
자금성은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박물관이며,
종합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때 처음 지어진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졌지만 청나라 때 고치고
새로 지으면서 명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 놓았답니다.
기본 구조는 물론이고 자재와 장식 등 모든 것을 명나라 때의
건축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자금성에는 건축물 외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한데 천자인 황제가 머물렀던
자금성의 공간들에는 하나같이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한 것이지요.
또한 자금성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물품들이 가득해, 황제들의
생활 모습과 옛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수많은 보석, 서예, 미술품, 공예품은
물론이고 궁궐의 벽과 바닥을 장식한 돌조각 하나까지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랍니다.
태화전 전경
태화문을 배경으로
태화문에서 태화전을 배경으로
태화문 계단에서 태화전을 배경으로
황제의 공식 업무 공간, 태화전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되어 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와이차오]와 내정[네이팅]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지요.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우먼]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지요.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 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랍니다.
외조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타이허뎬]과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중허뎬],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바오허뎬]으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외조의 중심은 자금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태화전이지요.
태화전은 황제가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장소로 황제의 즉위식,
탄생 축하 행사, 결혼식, 국가의 칙령 발표, 외국 사신 접대 및 조공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답니다.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이 64m, 폭 37m, 높이 27m에 달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으며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말,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으로 그 중 가장 멋진 곳은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앉았던 옥좌(의자)입니다.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답니다.
태화전은 여느 건축물과 다르게 3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지요.
기단에 장식된 동물 조각과 문양도 하나같이 아름다운데 목조 건물의 약점인 화재에
대비하여 궁궐 안에 "금수하[진쉐이허]"라는 인공 하천(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답니다.
태화전을 관람하려면 먼저 3단의 백색 대리석 기단을 올라가야만 합니다.
기단 앞에 놓인 18개의 대형 청동 향로가 시선을 끄는데 황제가 거행하는 공식 행사가
열릴 때면 어김없이 이 향로에 향을 피웠다고 합니다.
기단 맨 위 모퉁이에는 해시계의 일귀(日晷), 됫박처럼 생긴 계량 도구 가량(嘉量)이
탑처럼 생긴 작은 석조 건축물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해시계는 정확함을, 가량은 속임수 없이 공명정대함을 상징합니다.
황제의 공명정대한 정치 실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단을 오를 때 주의 깊게 살펴볼 또 하나는 난간의 모서리마다 설치한 용머리 배수구로
중앙 통로에도 하늘로 승천할 듯한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웅장한 외형을 감상한 후에는 내부의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에 감탄할 차례로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듯 태화전 정중앙에 수미단을 설치하고 옥좌를 놓았습니다.
최고 황권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금련보좌라 부르는데 황제가
옥좌에 앉으려면 7개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중국에서 숫자 9는 황제와 관련이 깊은 숫자인데, 여기 계단은 왜 9개가
아니고 7개만 있는 걸까요?
정답은 천장에 있습니다.
황제를 상징하는 숫자 9 중에서 나머지 2는 용 2마리가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옥좌 앞에 설치된 기둥 6개도 관람 포인트로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섬세하게
조각한 후에 금을 덧입혀 무척 화려하답니다.
태화문 전경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天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거대한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14년에 걸쳐 건설한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금성은
이전까지의 어떤 궁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했습니다.
전체 면적 72만m2, 건축 면적만도 15만m2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지요.
길이 960m, 폭 750m인 직사각형의 공간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방의 개수도 약 9000개나 될 정도였답니다.
자금성은 도시 속에 지어진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면적만 보면 마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폭 50m의 해자
(성 주위에 둘러 판 못)와 10m 높이의 성벽을 보면, 완벽한 하나의
도시로 보인답니다.
자금성 건설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건축 재료는 여러 곳에서 가져왔는데,
돌은 가까운 팡산 채석장에서, 벽돌은 산둥 지방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두 지역에서 자금성까지는 수십,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대리석과 나무는
쑤저우와 윈난 성 등 2000km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가져와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자금성의 방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건설될 당시의 소문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금성 방의 개수가 9999개라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자금성에 있는 방은 모두 8886개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더 믿고 있습니다.
태화전 옥좌 (※참고자료)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 거북(향로)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 학 (향로)
방화수용 청동항아리( 중량 2톤에 금박이 200냥)
중화전과 후면의 보화전 전경
중화전(中和殿)
태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평면은 정방형이며 단첨사각찬첨(單檐四角攢尖)에
정면 3칸, 측면 3칸, 높이 29m, 면적 580㎡입니다.
1420년(영락 18)에는 화개전(華蓋殿)이었고 1562년(가정 41) 중극전(中極殿),
1645년(순치 2) 중화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전각의 이름은 예기(禮記)의 중용(中庸) 중 '중이란 천하 모든 것의 가장 큰 근본이며, 화란 천하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中也者天下之本也, 和也者天下之道也)'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태화전에서 공식 행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평소에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청나라 때는 황실의 족보를 7년마다 개수하는 작업을 해
그 결과물을 중화전에서 진상받았습니다.
보화전(保和殿)
중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5칸, 높이 29.5m, 면적 1,240m²입니다.
1420년(영락 18)에는 근신전(謹身殿), 1562년(가정 41) 건극전(建極殿),
1645년(순치 2) 보화전으로 개칭했습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는 공간이었고, 청나라 때는 매년 제야와 정월 15일에 황제가
소수민족 왕공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1789년(건륭 54) 이후에는 이곳에서 전시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전각 중앙의 보좌 위쪽에는 청나라 제6대 황제인 건륭제가 직접 쓴
"황건유극(皇建有极)"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 찍은 사진이 많은 관계로 2부로 나누워 올려드립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드림파크 가을 나들이(2018.10.6) (0) | 2018.10.06 |
---|---|
북경 천안문광장과 고궁박물원.2 (2018.9.20) (0) | 2018.10.01 |
북경 다싼쯔 798 예술구(2018.9.20) (0) | 2018.09.29 |
북경서커스 우산과 방석돌리기 곡예(2018.9.20) (0) | 2018.09.29 |
북경서커스 팽이돌리기 곡예(2018.9.20) (0) | 2018.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