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처럼 단아한 정자 경체정과 기헌고택(2016.8.14)

2016. 8. 16. 21:08나의 이야기








단아한 선비같은 정자 경체정













경체정(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98호) 안내판 


조선왕조 정조때 (1776~1800) 승지를 역임한 강윤을 위시한 삼형제의 학식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 강태중이 1854년(철종 5년)에 건립하였습니다.














경체정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위치한 정자입니다.

 경체정은 뒤편에 낮은 산을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곳에

작은 연지를 만든 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라다 보면 단아한 선비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소박한 정자로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런 느낌이 드는 정자라고 할까요?


전국의 많은 고옥과 정자들을 찾아 다니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거의 대다수

 정자들과 고옥들은 문을 닫아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정자나 고옥을 만나면 그저 담밖으로 돌며 밖의 외관만 바라볼 수가 있었는데

그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기에 답답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설명이야 안내판이 있으니 대략적인 것은 알 수가 있지만 그 속을 모르니

그 정자와 고옥에 대하여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도 참 어렵단 생각이 듭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경체정 정자의 일각문이 열려 있는 탓에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기에 참 다행스럽습니다.
















경체정 측면 전경으로 측면2칸. 정면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 정방형으로 세웠으며

 앞으로는 누마루를 깔고 뒤로는 방을 드리고 주변 사방으로 난간을 둘렀습니다.

누각 밑에는 외바퀴 손수레가 놓여져 있는데 용도가 무엇인지는 ....?


경체정은 모두 4개의 현판이 달려있는데 정면에 두 개 , 오른쪽 측면에 2개 중

정면 오른쪽이 조선 말 당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6년도에 도난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의 현판은 모사품으로......ㅜㅜ


봉화군 법전면은 진주 강씨의 집성촌으로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임금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자 두 형제 강흡과 강각은 은거를 결심하고

 태백산의 봉화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강흡은 서인가운데에서도 노론에 속했는데 당시 영남 지방에서

 노론계 집안은 거의 드문 일이 었다고 합니다.


강흡의 후손으로 경체정 바로 후면에 있는 기헌고택의 주인 강두환은 한양에서

 벼슬을 하면서 추사 김정희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강두환은 현종이 세자였을 때에 세자 시강원 필선으로 왕에게 직언을 한 뒤 유배를 갔다가

 해제되어 고향으로 내려 와서는 불러도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옛날 선비들이 교우하던 방법은 학문과 시를 서로 나누고 글을 주고 받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비슷한 무렵 집안 사람인 강태중이 증조할아버지인 강윤,강환,강한 삼형제의

 학덕과 우애를 추모하기 위하여 경체정을 세우게 됩니다.


 여기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병국의 해서체 현판과 함께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이 걸리게 됩니다. 


아마도 추사도 같은 노론 당인이었는지라 서로 교분이 있었던 탓에  오지의 땅 봉화에도

 추사의 흔적이 남아있게 되었지만 경체정에 걸렸던 추사 현판은 2006년 도난을 당하고

 경체정의 모양새를 잃게되는 아픔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현판이란게 제 위치의 누각에 걸려 있을 때에 빛을 발하는 것인데 

 도대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는게 당췌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둥근기둥에는 후손들이 시구를 적은 주련을 붙였고

 내부에는 10여개의 시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정자의 이름인 경체정은 "시경""소아상체"시 "상체지화"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상체시의 내용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데 상체(아가위) 꽃에 꽃받침이 두드러져

 보이듯 형제간의 사이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가깝고 친하다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이 내용이 정자의 기문에 쓰여져 있습니다.














내부에 걸린 시판
















각 1칸의 온돌방 2개와 2칸 규모의 누마루



누마루엔 나무 탁자가 놓여져 있어 지금도 후손들이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엔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사용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체정에서 바라다 본 연지와 앞 개울 전경







이 개울을 경계로 양지말과 음지말로 나누워진다고 하는데 개울 건너 편인 경체정과

기헌고택이 있는 쪽을 음지말이라고하고 개울 건너 편을  양지말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 개울엔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한 개의 다리는 노론인 음지말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또 한 개의 다리는 소론인 양지말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져 옵니다.


이렇게 봉화로 내려 온 진주 강씨 집안에서도 조차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당파 싸움을 하였다고하니 근자의 사드 사태를 보면서 이 좁은 땅떵어리에서도 정치권이

  국익을 위하여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면에서 바라다 본 경체정















경체정을 배경으로 인중 샷을 찍은 후 경체정 좌측

후면 골목에 있는 기헌고택으로 향해봅니다.















기현고택 솟을 대문 전경으로 5칸규모의 문간채로 고택 앞의 여유 공간이 없는 탓에

전체 전경을 닮기엔 어려운 탓에 반쪽만을 앵글에 담아 봅니다.
















기헌고택 안내판



기헌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19호)은 1845년 기헌 강두환이 지어 거주하던 고택으로

 법전리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ㅁ자 정침 건물을 두고  전면에 대문채를 두었습니다.

안채 우측편으로 정면 4칸 ㅁ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있었다고하나

현재에는 도괴되어 터만 남아 있습니다.















ㅁ자형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침 전경으로

 팔작지붕구조로 건축되었습니다. 

















안채는 전면 0.5칸 규모의 우물마루를 두고 1.5칸 넓이로  2칸 규모의 방과 

 전면1칸,측면 2칸 규모의 마루를 둔 다음 부엌에 딸린 2칸 방으로 

안방을 만들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고방채는 합각지붕으로

 1칸 규모로 지어져 있습니다.   













중문에서 바라다 본 안채 전경













안채 우측의 부엌 과 고방채 전경
















안채 전경



현재 기헌고택은 후손 강석한의 소유로 관리되고 있으며 마침 제가 고택을 찾은 날

자택에 계셨던 탓에 솔잎향 그윽한 냉차 한 잔을 대접 받을 수 있었으며 고택의 내부를

 개방하여 주신 탓에 기헌고택의 진수를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이 곳을 찾은 낯선 여행객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친절하게 대접하던 주인장의

 고운 마음씨에 집안에 수 대에 걸쳐 흘러 내린 가풍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채에서 바라다 본 사랑채 전경














기헌고택의 종부가 직접 만든 꽃과 약재를 이용한 다양한 차들로

 종류가 150여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춘양목의 산지가 봉화인  탓에 아주 질좋은 금강송을 쓴 탓에

 서까래 마져도 굵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우수한 목재가 사용되었기에 기헌고택의 보존상태는 아주 양호합니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 마루 천정에 사용된 금강송의 붉은색 대들보와 서까래














사랑채 전경














반대편 사랑채 전경




이 사랑채는 한옥체험을 하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개방되어 있다고 하니

 혹여 체험을 원하신다면 문의하셔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실사구시 편액















ㅁ자 고방채 서까래 전경















ㅁ자 정침 마당에서 바라다 본 문간채














정면 6칸 측면6칸 규모의 정침은 측면으로 2칸규모로 지어졌으며 측면 0.5칸 중앙 4칸 규모의

 사랑대청을 두고 안쪽에 사랑채 앞으로 1.5칸 규모의 우물마루를 두었습니다.


대청 마루 2칸이 끝나는 지점에 또 다른 사랑채 2칸을 두고 온돌방을 두어 독특하게 대청을 끼고

 사랑채가 마주보는  형상으로 서울지역 고택의 전형적인 건축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