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5. 02:54ㆍ나의 이야기
2019 여행주간 "창경궁 달빛산책" 중 제일 아름다웠던 춘당지의 고운 반영
홍화문(弘化門) (보물 제 384호)전경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입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입니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습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홍화문 천정의 아름다운 단청과 다포방식의 건물구조
홍화문에서 바라다 본 옥천교와 명정문, 명정전의 전경
궁의 향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대다가 다른 궁과는 달리
일직선상에 놓여져 있지 않습니다.
옥천교 전경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 386호)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고
하여 옥천교라 하였습니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갑니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달빛 산책에 참여한 우리 팀원(19명) 일행들이 문화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는 전경
달빛산책을 참여한 관람객들이 의외로 제법 많았는데 보통 1팀이 20명 이내로
구성되어 한 10팀 정도가 홍화문 앞에서 7시 전에 담당 문화해설사를 만나면서
시작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옥션에서 창경궁 달빛산책을 예매할 때 이 프로그램이 궁중문화축전의
일환으로 알고 예매를 하였는데 와서 보니 이 프로그램은 별개의 프로그램으로서
야간에 문화해설사를 따라다니며 해설을 듣는 단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제가 착각을 하였던 이유는 궁중문화축전기간 중 야간 행사 예매가
선착순이었던지라 급하게 예매를 하다보니 큰 실수를.......ㅜㅜ
사실 창경궁은 여러 번에 걸쳐 온 적이 있었기에 궁중문화축전 야간행사에
참여하면 화려한 퍼포먼스가 있는 것으로 알고 예매를 하였는데 그런 퍼포먼스는
하나도 없이 문화해설사를 따라다니면서 해설을 들어야 했었습니다.
창경궁의 역사 지식에 관하여서는 저도 어지간한 문화해설사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ㅎ
근자에 참여한 궁중문화축전(경복궁 3,000원. 종묘 제래악 10,000원) 예매표보다도
더비싼 요금(15,400원)을 주고 돌아보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창경궁은 야간 상시개방인지라 언제든지 야간에 입장료 1,000원만 내면
21시까지는 개방이 되는 곳인지라......
어쨋던 예매를 한 탓에 달빛산책에 참여한 일행들과
행동을 같이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명정문(明政門) 및 행각(行閣) (보물 제 385호)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입니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습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정문의 안쪽 전경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 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입니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습니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입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서고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습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습니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습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합니다.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습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삼도 전경으로 좌우로 품꼐석이 배열된 전경
명정전 계단 중앙에 설치된 왕의 상징 봉황이 새겨진 화강암
일월오봉도 전경
명정전 천정에 조각된 봉황
명정전 천정에 곱게 단청된 아름다운 문양들
명정전 후면의 창호 전경으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고운 무늬의 창호 탓에
달빛 산책을 나온 관람객들의 사진 촬영 명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빈양문(賓陽門) 쪽 통로에서 바라다본 명정전 창호 전경
명정전 뒤쪽에는 빈양문이 있는데, 이 문은 국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입니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는 뜻으로,
밝음인 양은 국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문을 지나면 왕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통하기 때문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습니다.
지금의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중건 공사 때 재건한 것입니다.
명정전 후면 창호 전경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습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문정전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고,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숭문당(崇文堂)
숭문당은 글자 그대로 문(文)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국왕의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습니다.
숭문당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순조 때(1830년) 화재로
불탄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하였습니다.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입니다.
일감재자는『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일월오봉도가 후면에 배치된 문정전 내부 전경
문정전 천정 전경으로 1986년에 복원이 된 탓에 창호의 문양이라든가
내부 천정 문양이 단조롭다는 생각이.....ㅜㅜ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과에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19세기 궁궐기록화인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사시(四時)라는
숭문당 후면 전경
빈양문과 숭문당 전경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합니다.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입니다.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습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로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습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습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
쓴 현판을 걸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통명전(通明殿) (보물 제 818호)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입니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습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습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됩니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冽泉)이라 하였습니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만들었습니다.
양화당(養和堂)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습니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입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입니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재건되었습니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 11) 1월에 사도세자, 1790년(정조 14)에
6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입니다.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연못이 전부 춘당지는 아니었습니다.
춘당지의 아름다운 야경 반영
대온실(大溫室) (등록문화재 제 83호)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습니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입니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습니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제 창경궁의 관람시간을 끝마친다는 창경궁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이
나오면서 달빛산책은 끝이 납니다.
.
세운상가 전경
석가탄신일을 앞둔 종로3가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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