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조선시대의 교육시설이었던 대정 향교(제주도 세달살기 2020.10.8)

뽀다구 2020. 12. 30. 14:36

 

제주도 안덕면 단산 아래에 있는 대정향교의 대성전 전경

 

 

대정향교(大靜鄕校)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단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로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408년(태종 8)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대정현(大靜縣) 성내(城內)에 창건하였습니다.

 

 1652년(효종 3)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그 뒤 1835년(헌종 1)까지 세 차례 대성전을

 중수하고 1772년(영조 48) 명륜당을 중건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각 5칸의 대성전·명륜당, 동재(東齋)·서재(西齋)·신삼문(神三門)·

정문·대성문(大成門)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습니다. 

 

대정향교는 1971년 8월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1948년 4월부터는

 문명학원(文明學院)을 병설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장 전적은 ≪대정향교절목 大靜鄕校節目≫ 등 18종 37권이 있으며, 유교 경전의

 집주류(集註類)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향교는 주자학을 교육시키는 국립 교육기관이며, 제주에는 향교가 3곳 있고 제주목(용담동)에 

제주향교, 정의현(성읍리)에 정의향교, 대정현(사계리)에 대정향교가 있습니다.

 

 

동정문

 

 

명륜당 전경

 

 

내삼문과 대성전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들어갈 때 일반사람은 오른쪽으로 나올 때는 왼쪽으로, 

중앙으로는 위패봉안위(位牌奉安位) 즉 귀신이 다니는 곳입니다.

 

특히 사람이 들어갈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가도록 머리를 숙여

들어가도록 출입문은 모두 낮게 되어있습니다.

 

 

서재 전경

 

향교는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하였는데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동재 전경

 

조선 초기 왕조의 유교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가지고 집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습니다.

 

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농민들에게 향교 교육을 허락한 점은 그러한 반증입니다.

 

16세기에 와서 실록자료에 ‘교생은 양반이어야 한다.’는 논리의 주장이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조선왕조의 신분제적 편제가 강화되는 것을 배경으로 상위 신분의 양반이 유교 교육에 보다

전력하여야겠다는 명분적인 뜻이 강한 것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양반신분층의 배타적인

교육기회의 독점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생들의 사회적인 신분은 개국 초부터 이른바 양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으며, 16세기 이후 강화 양반신분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교생은

평민들이 상당수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동재(東齋)·서재(西齋)라는 기숙사의 구별을 나타내기도 하고,

액내(額內)와 액외(額外)로 양반과 평민 교생들을 구분하였습니다.

 

일단 교생이 되면 그들의 사회신분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법제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군역의 문제라든지, 과거시험을 응시하는 자격을 얻는다든가 하는 점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즉 향교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생원·진사시험 회시에 직접 응시하는 특전을 부여받거나

일강(日講)·월과(月課)에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면제받는다든지 할 때, 다만 교생이라는

신분만이 요구되는 것이지 양반이냐 평민이냐는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생들의 신분구성이 다양하였던 관계로 나중에 그들의 직업선택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생원·진사시험에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역학 생도(譯學生徒)와 각사(各司)의 이서직(吏書職)에

이르는 다양한 직종으로 진출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재의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추사 김정희 현판글씨

 

추사는 대정현에 유배하면서 벼루 열개가 구멍이 낫고, 붓 천 필이 망가지게 열심히 글을 썼는데 

심지어 유배를 보낸 헌종 마저도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였고, 수시로 많은 사람들이 추사에게

글을 써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귀양살이가 하도 힘들어 아내에게 수시로 편지하여

귀양생활의 불편한 생활필수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추사에 대한 이야기는 추사 완당평전 10권 중에 5권이 추사가 아내에게

쓴 서신 내용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세한도(歲寒圖)인데 그린 연유는 추사에게 한결같은

정성으로 귀한 책을 구해서 보내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답례로 그려준 것이라고 합니다.

 

 

 

명륜당

 

특히 전국 향교의 명륜당 중 유일하게 우진각 지붕을 가진 건물로, 세부양식과 가구 법 또한

제주 대정지역의 인문.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듯 소박하고 절제된 유교 건축물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의전당

 

 

 대성문

 

 

대정향교 경내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의미하여 소나무 3그루, 팽나무 5그루를 심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소나무 1그루, 팽나무 2그루만 있으며, 남아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세한도(歲寒圖)에

나오는 소나무처럼 아주 운치가 있어 보였습니다.

 

 

대성전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국립 교육기관을 가리킵니다.

 

대정향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세웠는데 이후 터가 좋지 않다 하여

여러 차례 옮기다가 효종 4년(1653)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영조 48년(1772)에는 명륜당을, 헌종 원년(1834)에는 대성전을 다시 지었고.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앞쪽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북향 하여 자리 잡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남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는 전학 후 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서재, 내삼문 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는데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으며, 1948년부터는 문명 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정향교 절목』등의 책이 남아있는데 유교 경전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정향교는 많은 보수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장식이 검소하여 전체적으로

간결한 느낌을 주며 경내에 큰 소나무와 오래된 거목들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대정향교의 대성전은 일반적으로 대정현(大靜縣)과 비슷한 소도시 지역의 대성전들이

정면 3칸 규모를 갖는 것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큰 규모로 조영 된 특징을 보여줍니다.

또 첨주(덧 기둥)를 사용해 출목도리를 받는 기법과 기단 상부에 제주도 대정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암석인 사암 판석을 사용하고, 우주(隅柱)의 공포에 사용된 고식 수법 등이 초창 당시의

건축적 요소와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처마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첨주는 타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주에서도 대정향교와 제주향교 대성전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건축적 특징이라고 합니다.


 

소나무와 팽나무

 

 

대정향교의 오랜 거목인 소나무와 팽나무 사이에서

 

 

팽나무

 

 

흥기청

 

 

전향문

 

 

세미물 전경

 

 

지금은 먹는 물로 사용을  안 하는 탓에 조금은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사실 제가 오늘 이 곳으로 향한 이유는 단산 오름(바굼지 오름)을 오르려고 이 곳으로 왔었는데

온 김에 대정향교는 덤으로 돌아보았답니다.

 

제가 이 곳 대정향교는 제주에 올 때마다 수십 차례나 지나쳤던 곳이 었는데 오늘 이 곳을

돌아보니 여행은 역시 발품을 판 것만큼 보인다는 이야기가 새삼 생각이 나더군요.

 

 

 대정향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서 이 곳 주민이신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에게 단산 오름으로

향하는 등로를 물었더니 세미소와 향교 사이의 샛길로 올라가면 된다기에 할머님 말씀대로

후면의 샛길로 단산 오름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님이 가르쳐 주신 등산로가 단산 오름으로 올라 갈수록 잡풀이 무성하고 인적이 걸었던

자국이 희미해져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간에 하산하기도 싫어서 그냥 계속 올라갔었는데

이게 알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7~8부 능선에서 올라가던 길이 숲과 험한 바위 군락들로

막힌 것을 알았을 때였었습니다.

 

 

단산(바굼지 오름) 7부 능선에서 바라다본 송악산과 가파도 마라도 전경

 

 

사계 해변과 형제섬 전경

 

 

막힌 등로에서 내려다보는 사계 해변의 아름다운 경치도 좋습니다.

 

알바면 어떻습니까 힘이 들면 힘이 드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게

저의 제주도 3개월 살기인데요.ㅎ

 

 이런 좋은 경치를 보려고 아르바이트했다고 치면

이것 또한 즐거움이 아닐까요?

 

사실 이렇게 알바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다름이 아닌 제 차의 네비 탓도

있었는데 제 차의 네비뿐만 아니라 모든 네비가 정확하게 오름의 출입 등로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특히 제주도에서 생경한 오름이거나 이름 없는 관광지를

찾아갈 때가 제일 편차가 심하더군요.

 

두 번째의 이유로는 수풀로 덮인 희미한 등 로라도 지역민들이 이용하는 지름길 같은

등산로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지 결과는 알바였기에......ㅎ

 

이 런 탓에 단산 오름(바 금지 오름)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상세하게 올려드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