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에 남겨진 추사 김정희의 흔적(제주 한달살이 8일차 2020.4.2)
제주 대정현 성내에 세워진 추사의 조형물
대정현성 안내도
추사유배지에 대한 설명
대정현성 안내판
조선 시대의 대정현(大靜縣)은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 한경면 일대로서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유배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495년(연산군 2) 환관 김순손(金舜孫)이 연산군의 난폭함을 지적하였다가 충군형을 받고
유배된 이래 조선 왕조 동안 총 60여 명이 유배되었습니다.
특히 1840년(헌종 6) 대정현에 마지막으로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특히 대정에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 홀로 사진사의 자화상
대정 현성 내에 있는 주막 비슷한 식당으로 코비드 19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없다 보니
영업을 포기하고 정낭(출입문)을 닫아버린 ㅜㅜ
추사기념관
본디 유배된 죄인은 행동이 제한되는 게 보통인지라 외부와의 연락은 서신으로만 가능하며
음식을 나르는 경우나 관료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루한 생활이 반복됩니다.
추사 역시 위리안치형으로 집 주위에 가시나무가 둘러쳐 있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일 뿐, 타 지역으로의 이동은 제한이 있었으나 대정현 내에서는 이동이 가능하였기에
추사는 대정향교 현판에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등, 지루하지만 여유로운 유배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추사는 시·서·화에서 조선 최고라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대정현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대정현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습니다.
또한 유배인 추사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여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추사는 1844년(헌종 10) 나이 쉰아홉에 수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어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이나마 토로하였습니다.
말방에(연자방아)
쉐막(외양간)
추사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초의선사
서귀포시 대정읍성 동문 자리 안쪽에 자리 잡은 추사유배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 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 김 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초기에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유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 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으로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습니다.
추사유배지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은 역사적·학술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나라 최고 명필로 알려져 있는데 하지만 추사가 명필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난관과 고뇌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병조·형조참판을 지낸 추사는 쉰네 살에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으로
떠나기 직전, 10여 년 전 일어났던 '윤상도 옥사 사건'이 다시 불거져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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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방 안에 거미와 지네가 기어 다니는 험난한 유배지 생활은 귀하게 자란 양반인 추사에겐
견디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는데 더욱이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든 날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편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삶 속에서도 그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했으며
한국 비문과 중국 비문의 필체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화가 날 때에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에도 붓을 들었으며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반가운 소식이 올 때도 지체하지 않고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로소 인생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는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자신에게 엄습해오면 몸부림치지 않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고통의 시간을 곰삭혀 글씨에 쏟아부으며 포기하고 싶은
세월을 붓질로 버텨나갔던 것이지요.
미술사학자 조정육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부서질지언정 휘지 않는, 탱자나무보다 단단하고 꼿꼿한 글씨가 탄생했다.
자신의 날카로움을 더 날카롭게 갈고닦아 한라산 고목처럼 뼈대만 남게 만든 글씨.
죽었으되 죽지 않고 물기만을 빼버린 채 천 년을 버티고 선 주목 나무 같은 글씨.
이 것이 유배지에서 탄생한 김정희의 추사체였다고 합니다."
추사는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써도 제주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힘썼는데 추사의 제자로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이상적·강위·허련 등이 있으며,
대정현 유배 중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 오·김 여추·김좌겸·박계 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추사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민규호의 기록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에 온 뒤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고,
두어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열려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적고 있는 등 추사는 19세기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물팡과 물허벅(물을 길던 옹기를 물허벅이라고 하고 물팡은 이를 올려놓는 곳)
눌(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 두거나 탈곡한 짚단을 쌓아 두는 것)
추사는 제주 유배생활을 하다가 1848년(헌종 14)에 풀려 복귀하였으나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습니다.
이 시기는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성행하던 때라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일흔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돗통시(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 놓은 공간)
대정현성 성곽 아래 마늘밭에서 농약을 살포하는 농민
대정 우물터 안내판
아쉽게도 우물은 수맥이 차단되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탓에 옛 정취를
찾아볼 수가 없는 탓에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제 짐작에 이 우물은 대정현성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수자원이었을
것이고 추사 또한 이 물로 유배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져......
대정현 성내에 조성된 아름다운 유채꽃밭 전경
이제 다시 애마를 몰아 방주교회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