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시안의 곡강이 변한 남호공원(2019.5.23)

뽀다구 2020. 2. 6. 23:22











곡강이 변한 남호공원 전경























곡강 진2세 묘를 돌아 본후 남호공원으로 향합니다.






























곡강 유적지 공원 안내도



남호공원(곡강 유적지 공원)은 역사 문화, 생태 원림, 산수경관, 예술 등이 하나로 뭉쳐진 곳입니다.


당나라 황실정원의 소재지이며 당나라 도읍 장안의 큰풍경 명승지였던 곳으로 2008년부터 종합형

생태자연공원으로 새롭게 지정되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입니다.

남호공원은 당나라의 분위기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곳은 오래 전 곡강이 흐르던 곳으로 중국의

옛 시인 묵객들이 많은 시적 영감을 받았던 곳입니다.


  잔디로 덮힌 넓은 광장 그리고 여러가지 조형물과 건축물들로 호수둘레를 따라

조성된 공원은 당나라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원 곳곳에는 당나라 때의 모습을 한 여러 조형물들을 보실 수 있으며, 그 당시 번영했던

 당나라 생활상들도 돌아보실 수 있습니다.






















남호공원 전체를 관람할 수 있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용 가격이 비싼 탓에

 아무도 타지 않았기 때문에 망해서 운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곡강지 표지판 전경  



 황장입수구란 포식은 황허장강의 입수구란 의미







곡강(曲江)


                                                         두보 (杜甫)



朝回日日典春衣
근무를 마치면 봄옷을 잡혀 몇 푼을 거머쥐고


每日江頭盡醉歸
매일 곡강(曲江)에 나가 술에 취해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
가는 곳마다 외상값뿐이지만


人生七十古來稀
덧없는 이 인생 그 무슨 걱정인가.





두보의 "곡강'이라는 시를 마흔일곱 살 되는 봄날 퇴근길에 남겼는데 겉으로는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덤덤한 척해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탓에 술을 마시면서도 마음 아파하는 것을 탓하지 말라고 방어선을 미리 쳤는데 기개를 펼치지 못하고

 생계형 말단 공무원이 되어 새장 속에 갇혀 사는 옹졸한 자기 신세를 자조하고 있습니다.

 

오랜 병고로 신산한 삶을 살다간 두보는 곡강에서 이 칠언율시를 읊었는데 산시성 시안에 위치한 곡강은

 고래로 역대 제왕과 풍류객들이 머물다 떠난 명승지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술빚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으로 미루어 두보도 시선 이백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술을 무척 즐겼나 봅니다.


 그 유명한 인생살이 일흔까지 사는 사람 드물다는 구절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두보는 이 시를 남긴 뒤 속진을 십년 더 뒤집어쓰고 세상과 불화를 겪다가

 쉰여덟에 객사하듯 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가 남긴 시구대로 드물다는 일흔은 고사하고 예순도

 채우지 못하고 황천길로 갔습니다.


그래도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그가 떠난 천이백년이

 지난 지금도 두보는 시성으로 추앙 받으며 그의 싯귀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백의 시는 육조에서 안사의 난 전까지의 낭만정신이 최고로 발휘된 것이고,

두보는 안사의 난 이후의 현실주의적 시풍을 연 것이라고 합니다.


두보의 시는 다음 시대인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 등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민중을 위한 시인으로 널리 존중되고 있습니다.

곡강(曲江)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남쪽의 장강[長江]을 가리킵니다.








































곡강유음은 장안팔경중 하나로 한나라와 당나라 시기 고관대작들의 정원이자 명승지였습니다.


황제는 이 곳에서 매년 상사(음력3.3),중원(7.15),중양절(9.9)때 신하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때 황제가 술잔을 올려 놓은 쟁반을 호숫가에 띄어 놓으면 그 해 과거에 합격한

 신참자들은 물결에 흘러 내려오는 쟁반위의 술잔을 하나씩 들고 줄겁게 마셨다고하여

 구강유음이란 이름이 붙여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