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곱게 물드는 남한산성 성곽길을 따라서(2019.11.2)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에 가을이 그린 수채화같은 고운 단풍
남한산성 안내지도
남한산성 (南漢山城)은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습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입니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으며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 때 처음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고 전하지기도 합니다.
1624년에 인조가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4문과 16암문, 성가퀴 1,897개, 옹성, 성랑, 우물, 샘 등의 시설을 갖추었는데 공사는 승려 각성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했는데, 7개의 절을 지었는데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습니다.
그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습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입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칸 반, 하궐(下闕) 154칸이었고
1688년(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습니다.
1711년(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으며
1624년에 세운 인화관(人和館:客館)을 1829년(순조 29)에 수리했습니다.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두었습니다.
또한 종각·마구(馬廏)·뇌옥(牢獄)·온조왕묘·성황당·여단(塾壇) 등을 두고,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을 두었습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습니다.
이밖에 현절사(顯節祠)·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영월정(迎月亭)·침과정(枕戈亭) 등이 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으로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는데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항복 후 수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받았습니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여러 차례 보수를 하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습니다.
11.2 토요일에 남한산성의 단풍구경 트래킹이나 하자는 광주에 사는 고교 동창친구의
갑작스런 요청에 제 애마로 남한산성으로 향했습니다.
남한산성은 아주 오래 전에 몇 번 와본 곳이지만 이맘 때 쯤이면 고운 단풍이 아주 예쁜
곳이기에 광주와 수지에 사는 동창친구들과 함께 가벼운 코스로 국청사 밑 소로에
차를 주차하고 남한산성을 돌아 봅니다.
남한산성 트래킹을 함께한 고교동창 친구들
서문 전경
날씨가 흐린 탓에 시가지가 제대로 바라다 보이지 않습니다.
암문 전경
청량당(淸涼堂)전경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합각지붕 건물로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祠堂)입니다.
이회(李晦)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았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처 송씨와 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습니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무죄가
밝혀져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을 지어 넋을 달래게 하였습니다.
본당(本堂)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 처첩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전쟁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이후 새로 만든 것으로 예로부터
정월 초이튿날에 제를 올리는데, 그 날이면 성 안팎의 부녀자들이 소원성취의 치성을 드리는 풍습이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수어장대(守禦將臺) 전경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로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합니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습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입니다.
병암남성 신수비 전경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단면을 볼 수 있는 금석문으로 내용은 , 정조3년(1779)
6월18일까지 약50여일간에 대대적인 보수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성을 증개축하는데 돈 1만냥과 쌀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여 ,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자와 , 보수영역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 패장의 이름 등이 기록되여 있습니다.
두개의 큰 돌로 되여있고 "병암"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마모되고 떨어저나간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보면
선명한 금석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청사(國淸寺)출입문 전경
삼성각 전경
대웅전 내부 전경
대웅전 전경
삼성각 내부 전경
천불전 전경
천불전 내부 전경
국청사 전경
1625년(인조 3)에 각성(覺性)을 팔도도총섭총절제중군주장(八道都摠攝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하고,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축조를 담당하게 할 때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국청사입니다.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군기(軍器)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던 사찰로 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普運)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삼문(成三問)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병풍 1점과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책자 3권이 전해오고 있으며
절 근처에는 국청사정(國淸寺井)이라고 하는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금닭이 나와 홰를 치며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가볍게 남한산성 단풍트래킹을 마치고 근처 제육보쌈집에서 간단하게 반주를 곁들인
쐬주 한잔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