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시안 대자은사 와 대안탑(2019.5.24)
북쪽 현장광장에서 바라다 본 대자은사와 대안탑 (大慈恩寺 · 大雁塔) 전경
대안탑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보살의 화신으로 기러기의 무리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죽은
기러기 한 마리를 탑을 지어 매장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시대에 진사 시험의 합격자가 여기서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안탑제명」이라는 성어도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탑 앞에는 당나라 때부터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산시성에서
배출한 거인들이 이름을 새긴 석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시안 시가지 전경
대명궁 근처의 지하철역
대명궁전경
대안탑 현장광장 인근의 다가구주택들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
다가구 주택들의 복잡한 내부상가 전경
도로 건너편 대당불야성의 상가들 전경
시안 관광지 근처의 슬럼화된 주택단지들을 미화한 벽화건물들
대당블야성 관광단지 안쪽의 제법 유명하고 큰 식당 종업원들의 조회 전경으로
이 곳에서도 사회주의 냄새가.....ㅎ
대당불야성 안쪽의 식당가 전경
식당가도로 반대편의 대안탑 전경
이 북쪽 현정광장 주변은 대형버스가 주차를 못하게 하는 지역이라 대당블야성 식당가
도로쪽으로 접근하여 식당가 골목을 통하여 북쪽광장으로 진입을 합니다.
오른쪽의 대당불야성 전경
식당가쪽 횡단보도를 건너서 북쪽광장쪽에서 바라다 본 대당불야성 중심 인도 전경
북쪽 광장(현장광장)의 우측 전경
북쪽 광장(현장광장)의 우측전경
북쪽(현장광장)광의 중심 전경
현장법사상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모델이 현장으로
중국 불교를 진일보 시킨 스님입니다.
당시 쇄국 정책으로 인도로의 방문이 금지되었지만,
현장은 구도를 위하여 서역행을 하였습니다.
(602년에 태어나 664년 입적)
이름 위(褘). 진혜(陳惠)의 아들.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동쪽에 있는
거우스현[緱氏縣] 출생으로 10세에 뤄양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습니다.
장안(長安) ·청두[成都]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
(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떠났습니다.
도중 고창국(高昌國) 왕 국문태(麴文泰)의 대접을 받았으며,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습니다.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는데,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와 파미르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야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한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를 저술하였습니다
북쪽 광장에서 현장법사상과 대자운사 그리고 대안탑을 배경으로
대자은사는 648년 당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가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 황후’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황가 사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장안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이었는데, 당나라 말기
전란 때 불에 타 황폐해졌습니다.
1887년에 보수하면서 본래 규모보다 작게, 7분의 1로 축소해 지었습니다.
현재에는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玄奘)이 머물면서 불경 번역에
몰두했던 곳으로 더 유명합니다.
사원 뒤뜰에 있는 대안탑은, 652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법문 경전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5층으로 지었는데 파괴되었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10층으로
높여 지었으나, 지금은 7층 전탑으로 높이가 64m에 달합니다.
위로 갈수록 탑의 폭이 좁아지고, 층마다
아치형 창을 낸 것이 특징입니다.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탑으로 독특한 외양이 눈에 와 닿았으나 대자은사 입장료와
탑을 오르는 비용을 지불하면 대자은사와 대안탑에 올라가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너무 비싸서 광장에서만 바라다보았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광장까지 돌아보기에는 시간도 부족한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대자은사 앞 광장은 또 하나의 사진 촬영 포인트로 경장(经藏), 율장(经藏), 논장(论藏)의
불교 경전에 정통해서 ‘삼장(三藏)’이라 불렸던 현장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담장 너머의 대안탑과 동상을 함께 넣어 사진 찍기에 좋습니다.
동상과 대안탑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실크로드 한복판에 서 있는 듯 합니다.
대자은사 뒤편의 북 광장(北广场)도 특별한데 아시아 최대의
음악 분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저녁 조명을 화려하게 밝히고 물을 뿜어 대는 분수를 보노라면,
마치 당나라 때의 영광이 재현된 듯하다고 합니다.
현장법사상
대당불야성 안내도
대당불야성은 쇼핑,외식,엔터테인먼트,관광,레저,비지니스를
결합한 시안의 원스톱 관광명소입니다.
남북길이 1,500m,동서넓이480m이고 건축면적이 65만 ㎡로 대당불야성의 중앙에는 남북을 관통한
1,500m의 조형물 산책로가 있고 산책로 양측에는 당나라시대 건축물을 모방하여 지은 시안콘서트홀,
취장미술관,취장영화관과 각종 상가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중앙산책로에는 이세민. 이융기,무측천등 당나라시대의 제왕과 이백,두보,왕유,안진견,오도자,
구양순,유공권,염입덕,염입본,장훤,감진, 현장,혜능 ,공해(구카이)등 유명역사 인물 그리고
영웅 이야기등을 배경으로하는 9조의 조각군이 현대 수경,조명시스템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전성기 당나라시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대당불야성 중심 인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국 처자들
대당불야성광장에서
대당불야성 조선족 식당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한 후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하여
북쪽 광장 우측면 도로쪽으로 향합니다.
아직 어둠이 찾아 오기는 조금 이른 편인지라 대당불야성 랔카페에서는
고객들을 위한 연주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곳 시안의 대당불야성은 밤이되면 빛의 거리로 변하다고 하는데 개별 관광이 아닌 탓에
시안의 핫 플레이스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게 무척 아쉽습니다.
시안의 중국 처자들
레스토랑 호객행위를 하던 중국인 처자로 그의 의상과 표정이 꼭 일본 닌자 스타일같은
느낌이 들어 로드 케스팅 모델로 .......ㅎ
벽화 건축물을 바라다보는 중국인 처자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남쪽 광장전경으로 우리가 이 광장을 떠난 뒤에
솟아 오르는 분수가 바라다 보이는 군요.
이 광장의 분수는 정해진 시간에 분수 쑈를 한다고 하는데 야간에 보며는
화려한 불빛과 더불어 무척 아름답다고 합니다.
차창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시안 길거리 전경으로 중국 젊은 영혼들은
무척 개방되어 있고 자유롭다는 생각이......ㅎ
중국을 여행하면서 근자에 느끼는 생각이지만 차창밖으로 바라다보이는 중국인 처자들의
무채색 패션이 이제는 우리나라 젊은 처자들의 최신 패션처럼 많이 화려해지고
다양해져 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