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허가 흐르는 중국의 고대 관문 동관(2019.5.23)
황허강을 마주하고 있는 동관의 수문 전경
황허가 흐르는 중국의 고대 관문 동관은 시안과 뤄양사이에
위치하며 더 동쪽에는 항곡관이 위치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황허가 북쪽에서 동쪽으로
꺾어지는 그 남쪽에 위치합니다.
서쪽에는 중원 오악의 하나인 화산이 위치합니다.
중국 역사의 여러 전쟁에서 많이 등장하며 안사의 난 때에 고선지가 이곳 수비를 담당했었고
몽골의 금나라 침공때 금군 정예병력 20만이 이곳에서 우주방어를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선지의 외모는 무장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용맹한 장수 같다기보다는 말쑥하고 수려한 외모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외모처럼 우유부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활을 쏘고 말을 탈 때의 고선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
그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영민했고 도량이 컸다고 합니다.
고선지는 스무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으로 가서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가
세운 공으로 인해 유격장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를 큰 재목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몽영찰이 그를 여러 차례 발탁했고
얼마 후 언기 진수사가 되었습니다.
평범한 그가 장수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741년 무렵으로 톈산(天山) 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가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북상하자, 고선지가 기병 2,000명을 데리고
토벌에 나서 진압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는 이 전투를 계기로 서역의 군사 요충지인 사진도 지병마사에 올랐습니다.
6년 뒤 1차 서역 원정 때는 한층 강화된 전투력을 선보여 747년 토번(吐蕃,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
(7~15세기까지 인도 서부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난 이슬람 왕조를 통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진출하려던 당을 견제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당이 이에 맞서 싸울 군대를 조직함으로써 고선지는 당시 행영 절도사로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 족의 군사 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했고, 계속 진격해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끊어 양국의 제휴를 단절시킨 이 공로로
고선지는 홍로경 어사중승에 올랐습니다.
750년에는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타슈켄트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으로 호송했습니다.
고선지는 2차 서역 원정의 공을 인정받아 751년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포로로 잡혀 온 석국왕이 참살되자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한꺼번에 탈라스(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당이 투르키스탄 서쪽 지역까지 진출한 것에 격앙된 상태로 결국 고선지는
정벌군 3만 명을 추려, 이른바 3차 서역 원정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튀르크계인 카를루크 족이 당과의 동맹을 깨고 반란을 일으켜
협공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탈라스 전투가 끝난 뒤 당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 절도사로
보내 우우림 대장군에 임명했습니다.
고선지가 장안에 돌아와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던 것은 이 패전의 원인을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상황 탓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우림(右羽林) 대장군, 금오대장군 등의 직함과
정2품의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판서 등급으로 재상의 반열에 다가선 것이지요.
이때 당연히 한족 출신 장수들의 질시가 따랐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고선지 장군은 탈라스전투에서 패하고 돌아 온 뒤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부원수로 임명될 때 까지
우우림이라는 대장군이란 직책으로 시안에서 5년간을 살게됩니다.
그는 당시 헌종으로 부터 하사받은 영안방과 선양방의 두저택을 오가며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안사의 난이 일어 나자 장안을 수비하는 부원수로 임명되어 안사의 난 전투에
참여를 하게 되는데 시안(장안)에서 150여 km 떨어져 있는 이 곳 동관에서 억울하게
참살을 당하게 됩니다.
참살의 까닭은 성주를 지키고 있으라는
황몀을 어겼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고선지는 안녹산 세력에게 뤄양(洛陽)을 빼앗기고 퇴각하던 당나라 군대를 지원해
전열을 정비하였고 반군을 격퇴하여 수도 장안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평소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많았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당현종에게 고선지가
마음대로 주둔지인 산저우(陝州)를 떠나 퉁관(潼關)으로 이동해 피해를 입혔다고 밀고해
진중에서 참형되고 말았습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봉상청은 범양평로절도사로 임명되어
낙양 방면 수비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고선지는 장안에 있다가 현종의 지시로 봉상청을 돕는 일에 나서게되는데 당의 조정에서는
이완(李琓)을 토적(討賊) 원수로 삼고 고선지를 부원수로 삼았습니다.
고선지는 장안에서 병사를 모아 천무군(天武軍)이라고 이름 붙인
군대 5만여 명을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이완은 현종의 여섯째 아들로 천무군의 상징적 존재였고,
고선지는 총사령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 현종은 환관인 변영성을 감문(監門)장군의
직함을 주어 딸려 보냈습니다.
고선지가 섬주에 이르렀을 때,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하는 봉상청을 만났는데
고선지는 봉상청에게 적의 규모와 전쟁의 상황을 들었습니다.
고선지는 이때 안녹산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요충지에서 싸우기 위해 동관(潼關)으로 퇴각하면서 섬주에 있던 관가의 창고를 열어
부하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준 뒤에 나머지는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이었습니다.
고선지는 험난한 땅, 동관에서 안녹산군을 굳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때 원수인 이완은 병법을 하나도 모르는 허수아비였었고 게다가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대하는 환관이 군대의 동정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감문 변영성은 자주 고선지의 군사 지휘를 걸고넘어지면서 간섭을 했지만,
고선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변영성은 옛정을 잊고 앙심을 품어 황제에게 고자질하고
거짓으로 고발을 일삼았습니다.
변영성은 고선지와 봉상청을 두고, “봉상청은 적들이 공격해 오자 무리를 요동쳐 흩어지게 했으며,
고선지는 섬주의 땅 수백 리를 무단히 버렸다”고 과장되게 보고했고, “적들이 도주한 뒤
관가의 창고를 개방하여 군사들에게 나누어 줄 양식을 도둑질했다”고 허위로 보고했습니다.
변영성은 동관에 이르러 봉상청을 먼저 처형하려고 했으나,
봉상청은 독약을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맥도수(陌刀手) 100여 명을 자신의 주변에 도열시키고 고선지의 무릎을
꿇린 뒤 황제가 쓴 문서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 내용을 다 들은 고선지는 마지막으로 항변했습니다.
“내가 적을 만나 물러난 것은 죽어도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위로는 하늘을 이고 있고
아래로는 땅을 밟고 있다. 나를 두고 양식을 도둑질했다는 죄목은 거짓이다.
”(《구당서》 현종 본기 및 《자치통감》 현종 33)
그때 도열해 있던 사졸들이 “거짓입니다”라고 땅이 진동하도록 외쳤으나,
변영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참수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명장 고선지는 전장에서 죽지 않고 모략질에 의해 죽었습니다.
물론 고선지가 죽고 난 뒤에 동관은 격파되었고, 고선지의 후임자인
가서한은 안녹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황제 현종도 장안에서 탈출해 파촉으로 몸을 피하는 수모를 겪어야했습니다.
또 변영성은 안녹산군에 사로잡혀 있다가 탈출했으나
조정에서 그를 처형해 버렸습니다.
당시 중국의 기록인 《구당서》, 《신당서》에는 고선지와 관련된
사실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후에 그의 전공을 인정한 것으로 또 뒷날 당시의 역사 사실을 정리한
《자치통감》도 그와 관련된 사실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당나라의 전쟁영웅으로 받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 장군으로
정복활동을 벌여 공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고선지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까맣게 묻혀져 있습니다.
이것은 흑치상지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으로 하지만 그가 개척한 실크로드는 당나라
국익에만 공헌한 것이 아니라 고려와 일본의 동서 무역과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고선지 장군이 지금의 길을 개척한 것이지요.
비록 고선지장군의 최후는 좋지 않았지만 그가 서역 원정에서 보여준
군사 전략은 후대에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한 영국 탐험가 슈타인(M. A. Stein)은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천재적인 전략가”라고 논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서구 사회에서 고선지는 단순한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제지 기술을 이슬람 세계에
전파하여 이슬람 문명과 유럽 문명 부흥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산시성 웨이난시 통관현으로 존재합니다.
또 동관은 삼국지연의, 또는 삼국지 정사에 등장하는 전투지역중 한 곳으로 서량의 유력군벌인
마초를 필두로 한 서량 군벌 연합과 조조군이 치룬 전투가 가장 유명합니다.
전투 결과는 조조군의 대승으로 군웅할거의 승리가 사실상 조조임을 쐐기 박은 전투로 이 전투에서
패배한 마초를 필두로 했던 서량 군벌연합은 거의 와해 되다시피 하였고, 마초 본인은 이 전투 이후
세력을 간신히 재규합하여 조조군에게 다시 맞서보나 내분에 휘말려 자신의 가족을 비롯해
큰 피해를 입고 결국 세력을 상당수 잃어 떠돌이 군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엔 유비군 세력에 몸을 맡기나 유비군 휘하로 들어간 뒤엔
별다른 군공을 세우지 못하고 병사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아버지인 마등은 이 당시 낙양에서 은거한 상태여서
동관 전투의 죄를 아들 대신 물어 처형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초는 패륜아라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이 곳 시안 부근은 중국 공산당의 전신인 팔로군의 제2차 국공합작 항일 투쟁당시 전적지이면서
이 들이 중국내에서 세력을 확대한 곳이다보니 어디를 가던지 이런 팔로군의 전적비가.....ㅎ
황허강변 전경
화산을 돌아 본 후 시안을 와서 황허를 못보고 간다면 시안 여행의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재중동포
가이드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여행 일행들과 현지 선택옵션으로 급조된 황허와 동관 특별 투어로
황허가 흐르는 좌측 선상가옥에서 점심을 예약한 후 황허 보트투어에 나섭니다.
중국의 젓줄인 황허 전경
황허 강변의 식당가 전경
황허 보트투어에 나서는 투어 일행들
저도 절친과 황허 보트투어에 나섭니다.
황허강을 배경으로......
동관 건너편의 황허강변 화력발전소 전경
황허강변의 동관 수문 전경으로 아마 이 곳 수문에서 황허로 나가고 들어오는
모든 물품들을 통제하고 관리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보투투어로 바라다보는 우측의 동관과 황허강의 출입문인 수문전경
동관이 있는 성채 전경
줌으로 당겨 본 동관 전경으로 동관은 제대로 된 경구로 만들기 위하여
한창 복구 공사 중에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중동포 가이드는 중국에서 역사를 배운 탓에 이 곳이 당나라 헌종 때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장군이
참형을 당한 장소라는 것을 잘모르는 탓에 그냥 황허강의 보투투어를 구경시켜주고 메기탕을
먹여주면서 생각지도 않던 약간의 돈벌이가 되는 장소로 생각을 하였겠지만 이 곳의
슬픈 역사를 아는 저로서는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황허를 통해 들어오거나 나가는 모든 물품들은 수문의 좁은 출입문으로 작은 배들을 통하여
동관 안으로 반입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시안의
방어를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좌측 끝부분의 선상레스토랑이 오늘 점심을 먹을 식당
황허 강변의 동관 경구 위락시설
보트투어는 황허 상류로 올라갔다가 하류로 향하는 코스로 투어를 했기에 황허 강변에서
한창 공사중에 있는 동관의 모습을 바라다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창 공사중에 있는 동관 성벽 누각 전경
양귀비의 동상도 바라다 보이는 ......
보트 투어를 마치고 황허 선상레스토랑에서 메기탕(백탕)으로 점심을......
선상레스토랑 난간에 기대어 황허강을 배경으로 .......
동관의 수문 앞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주어진 자유 시간에 잠시 발품을 팔아 동관의 수문을 돌아 봅니다.
지금은 수로에 퇴적물이 많이 쌓여 작은 배들이 오고 가기도 힘들게 변해버렸지만,
당나라 시대에는 황허를 따라 큰배들이 실고 온 물품들을 작은배로 옮겨 실고 오고
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황허 강변의 진시황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