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진시황 지하궁전 모형 전시관(2019.5.22)
진시황의 가상 무덤 전경
진 시황제(秦始皇帝)는 전국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 입니다.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혹 조정(趙政)으로 혹, 씨는 진(秦), 조(趙)입니다.
성명은 영정이고, 혹 씨명은 진정(秦政), 조정이며,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여정(呂政)이라고도 합니다.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상방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죽을 때 까지 친정을 하였습니다.
불노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습니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습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진릉 지궁 전경(진시황 가상 지하궁전)
아직 발굴하지 못해 볼수 없는 진시황릉의 지하궁전 내부모습을 여러 문서 자료와 현대 과학 기술을
동원하여 탐구 분석한 결과에 근거하여 재현해 놓은 모형전시관 입니다.
사실 병마용갱과 진시황의 무덤은 오늘 오후에 돌아보는 일정으로 병마용갱은 말 그대로
진시황의 무덤가에 있는 진시황 무덤 시설물의 일부분으로 진시황의 무덤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작은 동산이 전부랍니다.
광할한 지역의 넓은 면적을 지닌 진시황의 무덤이다보니 실제론 지하에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실제와 같은지에 대하여서는 다소 의문이 가시겠지만 문헌등을 참고하고 중국의 풍습을
참고하여 만들어 졌기에 진시황의 무덤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시황, 중국 통일
전국 7웅 중 하나인 진나라가 다른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진왕 정은 자신을 첫 번째 황제라는 뜻에서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시황제(진시황)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지한 대신 전국에 군현을 두고
직접 다스리는 중앙 집권적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전국을 관통하는 직도(直道)를 닦고 문자 ・ 도량형 ・ 화폐를 통일하는 강력한 통일 정책도 펼쳐 나갔으며,
북방 흉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진나라는 상앙, 이사 등의 법가 사상을 받아들여 강력하고 공정한 법에 따라 통치했으나, 가혹한 형벌에
반발해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통일 16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화폐통일
향로가 아닌 고관대작들이 음식을 데워서 먹는 신선로
문자통일
도량형의 통일
1층 복도 외벽에 전시된 진시황의 업적을 나타내는 벽부조물 전경
진시황의 지하궁전 모형도
진시황의 지하궁전 축성과정을 설명하는 모형도 전경
1,2,3호갱 모형도
진시황 가상 지하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전경
지하궁전 출입구 모형 전경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의 사체 전경
진시황의 지하궁전 전경
지하궁전의 천정 가상 모형 전경
시황제의 무덤 자체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둔덕 바로 아래,
내벽 안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이 피라미드형 흙둔덕은 원래는 낮고 숲이 우거진 산처럼 보이도록 조경된 것으로 능 내부는
광대한 지하궁전으로, 각지에서 징발된 70만여 명의 일꾼들을 동원해 36년이
넘게 걸려 완성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사마천(司馬遷:BC 145경~85경)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매우 깊은 지하까지 파들어갔고 그들은 청동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관을 안치했다.
그들은 궁전·누각·집무실의 본을 만들고 멋진 그릇, 값진 석재와
진귀한 물건들로 묘지를 가득 채웠다.
기술자들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석궁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장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의 여러 강, 예컨대 양쯔 강[揚子江]과 황허 강[黃河], 심지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수은으로 만들어 흐르게 하고 기계적으로 순환되도록 장치했다.
반짝이는 진주로 천상의 성좌를 천장에 설치하고, 금·은으로
새를 만들었으며 옥을 쪼아 소나무를 만들었다.
마차는 바닥에 진열했다. 등불은 고래기름을
연료로 써서 영원히 탈 수 있도록 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애써 천하를 통일해 놓고도 겨우 50세의 나이로 객사했는데 곧바로 제국이 무너지고
천하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그가 당치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불멸하리라 주장했고, 자신은 1대 황제(시황제)이며
다음은 2대, 3대…로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했습니다.
수백 년 이어진 주왕조도, 춘추전국의 나라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아니 그렇게 무너뜨린 장본인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으리라고 여겼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으로 다시 말하자면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연나라 출신의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 오게 하고(노생은
“진나라는 호(胡) 때문에 멸망한다”는 예언만 전해주었습니다),
서복(徐福, 서불(徐巿) 또는 서시(徐市)라고도 한다)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는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습니다.
(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일본에 정착해서 일본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말년에 접어든 그는 점점 죽음이 두려웠던지, 암살을 피하기 위해(218년에 박랑사에서 암살을 모면한 적이 있는데
이 암살 음모를 꾸민 사람은 나중에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장량이었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수도 함양 인근에 궁전 270개를 짓고 지하도를 통해
드나들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로 했습니다.
이 밖에 거대하고 화려한 본궁을 지었는데,
그 일부인 아방궁만 완성을 보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함과 화려함을 갖고 있어,
이후 ‘사치스러운 건물’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어
죽어서도 생전에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고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