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당나라의 별궁 화청궁(2019.5.22)
화청궁 주룽호의 정중앙에 자라한 만수전 전경
화청지(華淸池, 화칭츠)는 중국 시안시의 동쪽 35km 떨어진 '여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북으로는 위수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온천이 있어서, 43도의 온천수가 샘 솟습니다.
온천이 드문 지역이다 보니 3,000년 전인 주나라때부터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나라 때는 "여궁", 진나라때는 "여산탕", 한라때는 "이궁"으로
당나라때는 "화청궁"으로 불리어졌습니다.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때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당 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화청지는 대부분 불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정부에서 30%만 복원했다고 합니다.
화청지는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지로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온천을 즐겼던 휴양지로
유명한데 화청궁은 주나라 때부터 황실의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자주 찾아와 대규모로 전각을 짓고 정원을 만들면서 유명해진 곳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의 상징이 된 곳입니다.
현종은 당나라의 6대 황제로 27세에 즉위하여 '개원(開元)의 치(治)'를 열고 개혁과 선정을
베푼 총명한 황제이었으나 경국지색 양귀비를 만나면서 총명함을 잃게 됩니다.
현종이 자기 며느리를 취한 폐륜을 저지른 때문인지, 사랑은 영원하지 못했는데
국사를 내팽개치고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을 가던 중 양귀비를 비단 줄에 목매달아 죽게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종말을 가져 왔습니다.
오늘의 첫 투어 코스로 선택된 화청궁으로 향하는 인도변 조형물들
이렇게 이른 아침 서둘러 화청궁으로 향하는 이유는 이 곳을 찾는
많은 중국내의 관광객들 때문입니다.
요즘 중국내의 어지간한 관광지는 관광객의 95%를
차지하는 중국 내국인들 때문이랍니다.
워낙 인구가 많은 중국이다보니 조금 유명한 중국내의 관광지는 살기가 좋아진
형편때문인지 조용하게 돌아 볼수가 이젠 없습니다.
그들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혼잡함은 이제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구경을 하는 수 밖에는.....
이런 탓에 아침부터 서둘러 화청궁을 찾아왔지만 역시 예외는 없었습니다.
대당 화청성 안내도
시안시 린퉁구 전역 전경도
장한가 광장 전경
사실 화정궁(華淸宮)을 이야기하려면반듯이 짚고 가야할 시(詩)가 한 편 있는데,
바로 당(唐)나라 시인(詩人) 백거이가 쓴 장한가(長恨歌)입니다.
장한가(長恨歌)는 당(唐)나라 6대 황제인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소재로 한
120행 840자로 된 장시(長詩)이며,로멘틱하고도 비극적인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바탕으로 읊은
백거이(白居易)의 대표적 서사시(敍事詩) 입니다.
백거이는 본 시(詩)에서 한(漢)나라를 빌어 와 당(唐)나라을 읊었는데,이는 자신이 당나라의
녹봉(祿俸)을 먹는 관리로서 차마, 자신의 조국(祖國)을 대놓고 작품으로 쓸 수가 없었기에
옛 한(漢)나라를 빌어다가 끼워넣은 것입니다.
장한가(長恨歌)는 긴 탄식의 노래란 시제(詩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틋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안타까운 시(詩)이기에, 그동안 여러 편의 가무극(歌舞劇)으로 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객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며 감동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화청궁 정문 전경
화청궁 앞에 줄지어선 산둥성에서 수학여행을 온 중국 중학생들
화청궁앞 광장의 양귀비와 현종을 형상화한 분수대 앞에서
매일 야간이 되면 장한가무쇼가 열리는 주룽호 전경
왕이 사용하던 온천 유적 오른쪽에 주룽호(九龙湖)라는 호수가 있는데
푸른 물 위로 호숫가 풍경이 반영되어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매일 저녁 8,000명의 관람객을 수용하는 장한가무쇼가 열리는데
우리도 오늘 저녁에 이 곳에서 장한가무쇼를 관람할 예정입니다.
매년 4~10월 밤이 되면 화청지는 현종과 양 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공연 ‘장한가(长恨歌)’의 무대로 변신합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를 바탕으로 장이모우 감독이 연출했는데 화청지를
병풍처럼 감싼 리 산에 조명을 설치해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며, 장중한 음악이
춤동작과 조화를 이룹니다.
저녁 8시에 시작하여 1시간 10분간 공연하는데 티켓 가격은
좌석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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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전 전경
비상전 전경
비상전(飞霜殿)은 밤낮으로 미모를 가꾼 양 귀비가 현종을
침실로 이끌었던 둘만의 처소입니다.
양귀비가 목욕을 하던 해당탕
해당탕(海棠湯) 혹은 귀비지(貴妃池)라고 하는데 양귀비가
전용으로 목욕을 하던 곳입니다.
양귀비는 이곳에 한약재와 꽃잎 등을 탕 속에 넣고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바닥의 옥돌에는 그 주인이 그녀임을 알려주는 ‘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화탕(蓮華湯),현종 전용 욕탕
해당탕(海棠湯)에 비해선 약간 단조로우나 웅장하고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합니다.
화청지(華淸池)는 시안에서 동쪽으로 30여km 떨어진 임동(臨潼) 남쪽의 여산(驪山)
북쪽 기슭에 세워진 일종의 별궁이며,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당나라 왕실 운림유적입니다.
화청지(華淸池)는 여산(驪山)의 온천으로 유명하여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입니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서주(西周)시기,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여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습니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당천궁(湯泉宮)을 지었고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습니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華淸池)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화청지(華淸池)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화청지(華淸池)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c를 유지하며
다량의 광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양귀비가 장기간 미모를 유지한 것은 화청궁에서 장기간
약수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화청궁(華淸宮) 로멘스의 당사자인 현종은 본명이 이융기(李隆基)로
당(唐)나라 제 6대 황제(皇帝)입니다.
그는 2대 황제(皇帝)인 태종(太宗 ) 이세민(李世民) 이후,당나라의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기를 맞이한 황제(皇帝)이기도 합니다.
현종(玄宗)은 27세 때 제위에 오른 1년 뒤부터 연호(年號)를 개원으로 정하고
백성들을 위한 위민(爲民) 정치에 본격적으로 몰입합니다.
현종을 섬기던 관리 중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대신들에게 설파하며백성들을 세세히 살펴 민생(民生) 위주(爲主)의
정치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어느 해 나라에 가뭄이 들자, 황궁의 쌀을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宦官)과 인척(姻戚)들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종은 놀고 먹는 사찰과 승려의 수를 대폭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朝廷)을 정비하고 상벌(賞罰)을 엄정히 집행하여 중종(中宗) 이후 혼란스러웠던
당나라 조정(朝廷)을 안정시킵니다.
현종의 훌륭한 정치 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강성해졌으며,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이룩한 태평성세(太平聖歲)에 버금가는 치세(治世)를 하여 사람들은 현종의 연호(年號)인,
개원(開元)을 따서 개원의 치라고 칭송하며 황제(皇帝)를 존경하였습니다.
몇년 간 이러한 태평의 치세(治世)가 계속되자 현종(玄宗)은 느슨하고 거만해져,
자신을 위해 직언(直言)을 하는 올 곧은 대신(大臣)들을 한 명 한 명 내치고,
자신에게 아첨을 일삼고 순종하는 신하들을 중용하게 됩니다.
또 향락에 물들어 "이원"을 세우고 광대들을 키워내기도 했습니다.
급기야는 유능한 승상(丞相)"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를 중용하였는데, 이임보(李林甫)는
무능한 자이지만 아첨(阿諂)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해 현종의 총애(寵愛) 속에 승상(丞相)이 됩니다.
승상에 오른 그는 황제(皇帝)에게 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 하고 19년 간이나
국정(國政)을 전횡(專橫)합니다.
원래 양귀비(楊貴妃)는 현종(玄宗)의 18번 째 아들
수왕(壽王) "이모"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모(李瑁)와 5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서기 737년 현종(玄宗)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시름에 방황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여자를 바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려 이때부터
만사(萬事)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심 끝에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를 시켜 은밀히 그녀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녀가 바로 수왕(壽王)의 비(妃) 양옥환(楊玉環)입니다.
양옥환(楊玉環)은 현종(玄宗)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현종(玄宗)이
자신의 18번째 아들인 이모(李瑁)에게서 가로챈 것이지요.
이후 현종(玄宗)의 나이 61세 때에 27세인
양옥환(楊玉環)은 귀비에 책봉 됩니다.
귀비(貴妃)는 황후(皇后) 다음 가는 자리였는데, 당시 황후(皇后)가 죽고 없던 터라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며 막강한 권한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이 여인이 바로 이 곳 화청궁(華淸宮)의 안주인 노릇을 한 양귀비입니다.
양귀비(楊貴妃)는 자신의 뒷배경을 튼튼히 하고자, 현종(玄宗)을 설득하여 그의 사촌 오빠인
양소를 궁궐로 불러들여 곁에 두었는데,그는 양귀비의 비호(庇護) 속에 황제(皇帝) 가까이서
비위를 맟추며 권력(權力)을 야금야금 장악해 갑니다.
현종으로부터 "국충"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으며
승승장구(乘勝長驅) 합니다.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은 나라와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황제가 손수 지어준 이름입니다.
양국충(楊國忠)은 양귀비(楊貴妃)가 현종(玄宗)의 엄청난 총애(寵愛)를 받음에 따라,
그의 후광(後光)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 및 시어사(侍御史)라는 직책까지 오르며
황제(皇帝)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영광과 막강한 권력(權力)까지 얻습니다.
그는 권력 가까이 있던 환관(宦官) 고역사(高力士)와 결탁하여 환관청치(宦官政治)를 강화하며
40여 개에 이르는 주요 관직(官職)을 겸직해,그 권세(權勢)가 나라 안팎을 뒤흔들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무렵 양귀비(楊貴妃)는 현종(玄宗)을 설득해 이국적(異國的) 마스크를 가진
돌궐족(突厥族) 출신의 젊은 장수 "안록산"을 측근으로 기용합니다.
안록산(安祿山)은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랫배가 무릎까지 처지고 몸무게가 330근(약 200kg)에 달했다고 합니다.
처음 안록산을 본 황제는 그의 배를 가리키며 묻습니다.
"그대는 뱃속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뚱뚱한 것인가?"
그러자 안녹산(安祿山)이 대답합니다.
"예, 폐하! 오직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인 충심만 가득 들어 있을 뿐이 옵니다."
이에 현종(玄宗)은 크게 기뻐합니다.
안록산(安祿山)은 더 나아가 곁에 앉은 양귀비(楊貴妃)를 보고는 양아들이 되고싶다고 간절하게 청하자,
양귀비도 크게 기뻐하며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여 총애하였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을 양자(養子)로 맞아들여 아들로 삼았으나,실제로는
양귀비(楊貴妃)와 은밀한 연인 사이란 소문이 궁궐 안팍에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습니다.
어쨋거나 양귀비(楊貴妃)의 든든한 후광(後光)을 등에 업은 안록산(安祿山)은, 곧 바로 평로(平盧)와
범양(范陽) 절도사(節度使)를 겸직하는무관(武官)에 임명 됩니다.
안록산은 천하(天下)에 두려울 게 없는 권세(權勢)와 호사(豪奢)를 누리며 20만 명의
병사(兵士)들을 이끄는 병권(兵權)까지 거머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치(內治)는 양국충(楊國忠)에게 외치(外治)는 안록산(安祿山)에게 내주고,현종은
대신들의 충언(忠言)에 귀를 닫아버리고 향락(享樂)에 취해 세월이 가는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나라 안팍에서 크고 작은 변란(變亂)과 반란(反亂)이 일어나고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의 상소문(上疏文)이 빗발치며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하늘을 찌르자,
안록산(安祿山)은 드디어 기회가 왔슴을 직감 합니다.
그러잖아도 황제(皇帝) 곁에서 아부만 일삼는 양국충(楊國忠)이 항상 눈에 가시였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는데, 하늘이 내린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양국충(楊國忠)을 제거할 절호의 호기(好機)로 판단한 안록산은, 간신들을 제거하고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名分)을 앞세우고 자신을 총애하던 양귀비(楊貴妃)와
현종(玄宗)을 배반하고 호족(豪族)이며 그의 측근인 사사명과 모의하여
반란(反亂)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안록산의 난" 이른바 "안산의 난" 입니다.
서기 755년 11월에 일어난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그야말로 당(唐)나라의
국운(國運)이 휘청이는 엄청난 혼난(混亂)이었습니다.
안록산(安綠山)은 한 달도 안 돼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이듬해 정월에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장안(長安)을 접수하며 황궁(皇宮)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그는 용상(龍床)에 앉아 황제(皇帝)를 자처하고 수많은 백성들과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무서운 기세(氣勢)을 떨쳐,황궁(皇宮)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됩니다.
당시 안록산(安祿山)이 이끄는 반란군(叛亂軍)이 황궁(皇宮)으로 몰려오자, 겁에 질린 현종(玄宗)은
양귀비(楊貴妃)를 앞세우고 양국충(楊國忠), 고역사(高力士)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사천(四川) 즉
옛 촉(蜀) 땅으로 황급히 도망을 칩니다.
샨시성(陝西省) 마외(馬嵬)에 이르렀을 무렵, 전란(戰亂)의 원흉(元兇)으로 지목된 양국충(楊國忠)을
증오하던 근위대장(近衛大将)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황제를 호휘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황제(皇帝)에게 다가와 길을 막고서는 도적의 근본인 양귀비와 양국충을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양귀비는 심궁에 있던 몸이고 양국충은 모반과 무관하다라고 옹호했지만,
병사들은 양국충(楊國忠)과 그의 부인들을 마차에서 끌어내어 처형합니다.
그러던 차 겁에 질린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의 진언(眞言)에 따라, 부들부들 떨고있던
현종(玄宗)은 양귀비(楊貴妃)에게 어쩔 수 없이 자살(自殺)을 명합니다.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도움으로 양귀비(楊貴妃)는 나무에 목을 매 죽습니다.
안사의 난이 가까스로 진압되고 나서 황궁으로 돌아온 현종(玄宗)은 황제의 자리가
이미 큰아들 숙종(肅宗)에게 이양된 상태로 세월만 보내게 됩니다.
그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양귀비(楊貴妃)를 눈물로 매일같이 그리워 하며
6년을 더 살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사서(歷史書)는 서기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까지 7년 2개월 동안 당(唐)나라를 휩쓴
"안사의 난" 때에 3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 당시 백성들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입니다.
양귀비가 목욕을 하고나서 몸과 머리를 말렸다는 비각 전경
대신들이 목욕을 하던 탕 전경
성진탕(星辰汤)’은 태종인 이세민이 애용
상식탕 전경
상식탕(尙食湯)은 황제에게 음식을 올리던 요리사들의 목욕탕이지만
다른 관원들도 목욕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상식탕(尙食湯)의 바닥에는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것은 황제의 음식을 요리하는 요리사들이 손으로
자신의 발을 씻지 않고 구멍에 세워진 나무기둥을 이용해서 발을 닦도록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이유는 황제가 드실 음식을 만드는 손이 더러운 발을 만지지
못하게 함이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구멍이 6개 난 곳은 목재 기둥을 세워 발에 손을 대지않고
기둥에 발을 비벼 각질을 제거하던 곳
양귀비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모습의 동상
양귀비(楊貴妃)는 옛 촉주(蜀州) 사천성(四川城) 두장옌(都江堰) 즉 도강언 출신으로
본명(本名)은 "양옥환"입니다.
그녀의 고조부(高祖父) 양왕(楊汪)은 수 양제(隋 煬帝) 양광(楊廣)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重臣)이었으며
아버지 양현염(楊玄琰)은 촉주(蜀州)에서 호구(戶口)를 조사하는 관리였다고 합니다.
그는 슬하에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두었는데, 양옥환(楊玉環)이 막내였고 2명은 언니였으며
셋 모두 미색(美色)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던 차에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자, 어린 자매들은 낙양(洛陽)에서 하급관리였던
작은아버지 양현교(楊玄璬) 슬하에서 자라게 됩니다.
숙부(叔父)는 가정교육에 엄격하여 조카들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치고
많은 시문(詩文)을 외우게 했는데, 총명했던 양옥환(楊玉環)은 숙부 집에 있던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호선무(胡旋舞)를 몰래 배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당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던 친척 양신명(楊愼名)이 여는 연회(宴會)에
가끔 불려다녔는데,이 자리에 참석했던 현종(玄宗)의 18번째 황자(皇子)인
"이모"의 눈에 뛰어 그의 비(妃)가 됩니다.
그녀는 수왕(壽王) 이모(李瑁)와 5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차 현종(玄宗)이 총애하던 무혜비가 갑자기 병으로 죽는 일 발생하자, 현종(玄宗)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맘에 드는 미녀(美女)를 찾다가 그만 아들의 비(妃)인 양옥환(楊玉環)을
우연히 보고서는 그녀의 눈부신 자태에 반해버립니다.
그 날 이후로 현종은 무혜비(武惠妃)를 닮은 미모(美貌)와, 시(詩)와 가무(歌舞)까지 능하다는
양옥환(楊玉環)에게 관심이 쏠리자,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를 불러 은밀히 상의합니다.
고력사(高力士)는 양옥환(楊玉環)을 만나 황제(皇帝)의 의중을 암시했고, 현종은 양옥환을
화산(華山)의 도사(道士)로 출가시켜 아들인 이모(美貌)에게서 떼어놓고, 궁내(宮內)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급히 짓습니다.
그리고는 양옥환(楊玉環)을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이때 양옥환(楊玉環)은 22세였으며 현종(玄宗)은 57세였습니다.
5년 후 양옥환(楊玉環)이 27세 되던 해, 현종은 그녀를 자신의 비(妃)로 맞아들여
"귀비"가 되면서 두 사람은 질펀한 사랑의 늪으로 점점 빠져듭니다.
그리고 얼마 후 현종은 양귀비(楊貴妃)의 두 언니까지 자신의 비(妃)로 맞아
3자매를 모두를 자신의 비(妃)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서 "귀비"란 황제(皇帝)의 삼천 명에 달했다는 많은 비(妃) 중에 한 명이지만, 황후(皇后) 다음가는
넘버 2의 위치로 엄청난 위세(威勢)를 떨치는 막강한 서열에 해당 됩니다.
때 마침 황후(皇后)가 죽고 없자, 양귀비(楊貴妃)는 자연스럽게 황후의 자리를
대신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비파(琵琶)를 비롯한 악기와 가무(歌舞)에도 능하며 애교(愛嬌)와
교태(嬌態)를 타고났고, 살결은 백옥(白玉) 같이 희었다고 문헌에 기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옥(玉)에 티라고 할까요?
아니면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할까요?
그녀는 겨드랑이에서 야릇한 냄새가 풍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현종(玄宗)이 더더욱 총애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양귀비는 다른 여러 비(妃)들 보다 유달리
목욕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양귀비(楊貴妃)는 요즘으로 치자면 부잣집 맏며느리감으로 불리는 볼륨께나 있는
약간 뚱뚱하고 풍만한 글래머형의 체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역사서(歷史書)를 종합하여 그녀의 체형을 유추해 보면 키는 155cm 정도 이고,
체중은 65kg 가량 나가는 건강한 체형임을 양귀비(楊貴妃)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있습니다.
여러 글에서도 양귀비(楊貴妃)를 "자질풍염" 풍만하고 요염하다 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녀의 자태(姿態)를 대략 짐작할 수 있으며 당시의 미인(美人) 기준으로 볼 때
감히 따라올 자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역대(歷代) 나라가 기울 정도로 뛰어난 미색(美色)이 출중했던 미인(美人)이 중국에는
여려 명 있었는데, 4명만 꼽아보면 그 중 한명에 단연 양귀비(楊貴妃)가 포함 됩니다.
첫째, "서시"로 그녀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월(越)나라의 미녀로,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선물로 보내진 여인입니다.
오나라가 월나라에 패망(敗亡)하게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합니다만,
그녀의 말로(末路)는 여러 설들이 분분하여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왕소군으로 전한(前漢)의 9대 황제인 선제(宣帝) 때 궁녀였는데, 훈족의 군주(君主)인
호한야 선우(呼韓耶 單于)에게 평화의 선물로 보내진 여인이며 선제(宣帝)도 그녀의 미모에
반해 매우 아까워 했다고 합니다.
셋째로, 초선인데 삼국시대(三國時代) 동탁(董卓)을 제거하기 위해 왕윤(王允)이 자신의
의붓 딸을 연한계로 이용한 여인입니다.
결국 동탁(董卓)을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동탁을 죽인 여포(呂布)의 부인으로 살았으며
조조(曹魏)가 매우 탐을 냈던 여인이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소개한 양귀비(楊貴妃)를 꼽는다고 합니다.
정중앙의 만수전과 우측의 비상전
장생전 전경
화청궁의 중심 전각인 장생전(長生殿)과 부용호(芙蓉湖
망경문 전경
화청궁 출입문 전경
화청궁의 면적은 굉장히 넓어서 각종 전각들이 무척 많은 데도 패키지여행에서는 두 시간 정도
머무르며 돌아다니다보니 화청궁을 제대로 보기엔 시간이 무척 부족한 곳이랍니다.
사실 이 번 여행에서 절친과 저는 화청궁을 세 번에 걸쳐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패키지여행에서는 이 곳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세세하게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세 번이나 화청궁을 돌아볼 수 있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시리란
생각에 그 방법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 곳을 입장할 때 입장권은 장한가무쇼를 포함하여 미리 꿇고 입장을 하였기에 제 수중에
야간 장한가무쇼를 보기위하여 입장권이 보관될 수밖에 없었는데 일행들이 이 근처에서
오후 늦게 맛사지를 받는 동안 저희들은 그 시간을 이용하여 그 입장권으로 다시
이 곳으로 와 재입장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나서 맛사지를 받은 일행들과 함께 다시 야간 장한가무쇼를 보러 다시 입장을
하다보니 총 3번을 화청궁을 들어가는......ㅎ
사실 중국에서 맛사지는 선택 옵션이었는지라 그닥 흥미도 없었기에 야간 장한가무쇼 때문에
화청지 근처에서 맛사지를 받다보니 그 시간을 저희가 이용한 것이지요.
입장권은 한 번 발매가 되면 24시간동안은 유효하다는 기본 인식아래.......ㅎ
이런 탓에 화청궁에 관하여서는 총 세 번에 걸쳐 제 불로그에 올려드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