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을 찾아서(2018.10.16)
신라의 마지막 비운의 왕이었던 경순왕릉 전경
(고교 절친들과의 파주 연천 여행 2번째 나들이 코스)
사적 제244호 신라경순왕릉 안내판
경순왕릉 입구에 있는 마의태자 단과 고려대장군 김순웅 영단 전경
마의태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장남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마의를 입고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세상을 등진 비운의 태자입니다.
원래 마의태자의 묘는 북한 지역에 있기에 후손들이
경순왕릉 주변에 단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김순웅(932-1015) 장군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손자로 마의태자 둘째 아들로
경주김씨 은설공파이며, 경주김씨 대장군공파의 중시조입니다.
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 (재위 927∼935)의 무덤 전경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습니다.
고려 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순왕이 원치 않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때는
이미 신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였습니다.
780년 혜공왕이 피살되면서 시작되었던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신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이 10년이 채 안 되는가 하면, 귀족들은 끝없는 탐욕에 눈이 멀어 다투었고,
그 사이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였습니다.
노비를 3천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 노비가 되거나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합니다.
고향을 떠나 산속에 숨어 도적이 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마침내 공공연히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왕실을 떠난 민심을 읽지 못하는 경문왕(景文王, 48대)에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진성여왕(眞聖女王, 51대) 때에 경주 거리에는 ‘나무 망국 찰니나제’라는
글귀가 뿌려졌습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서 외웠던 염불 ‘나무아미타불’을 빌어 사람들은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이라고 빌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관직을 버리고 서라벌을 떠났습니다.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며,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 혹은 實虹·乍慶)이며, 아버지는 신흥대왕
(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고,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입니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이며,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입니다.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할 무렵 이미 지방에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정권이 형성되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918년(경명왕 2)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경명왕이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또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애왕(景哀王)이
더욱 친고려정책(親高麗政策)을 추진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였습니다.
서기 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자 당시의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군사가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은 서라벌에 당도해 왕을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그 일가친척 중 동생 벌인 부(傅)를 세워 왕을 삼았으니 그가 곧 경순왕입니다.
경순왕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왕위에 올라 경애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습니다.
이듬해엔 왕건이 기병을 거느리고 서라벌에 당도했는데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예의를 다해 그를 맞이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경순왕은 왕건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화란을
초래했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쳐 놓았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리고는 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의 모든 사람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왕건 또한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왕건은 그로부터 3개월 이상을 경주 인근에서 체류하면서 수시로 경순왕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왕건의 부하들은 도적들의 침입을 막고, 궁중에 들어갈 때에도 예의를 차려
신라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개경으로 돌아와서도 왕건은 사자를 보내어 왕과 관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등 통일을 위한 포석을 깔아 나갔습니다.
935년 3월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을 비롯한 형제들의 음모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3개월 후 6월 견훤은 유폐되어 있던 절을 탈출하여 고려군이 점령하고 있는
금성(錦城)으로 일단 피신했다가 고려 태조의 도움으로 개경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견훤은 태조로부터 상보(尙父)의 존칭을 받았고, 그 지위가 백관(百官)의 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에 놀란 경순왕은 더 이상 보호국의 처지에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마침내 935년 10월. 경순왕은 신라 사방의 땅이 모두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고,
국력은 약해져 도적이 들끓으니 도저히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정하는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옳으니
그르니 하며 의논이 시끄럽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태자 일(鎰)이 말했다. “나라가 보존되거나 멸망하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들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해서 힘을 다해 본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이나 전승해온 나라를 남에게 쉽사리 내줄 수가 있겠습니까?”
경순왕은 이를 받아 말했습니다. “나라가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존될 수가 없다.
이왕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간뇌도지(肝腦塗地: 참혹한
죽임을 당하여 간장과 뇌수가 땅에 널려 있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애를 씀을 이르는 말) 함은 나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935년 경순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국가를 고려에 넘겨 줄것을 결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국서를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혔다고 합니다.
이때 태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을 고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면서 보낸 마의태자이며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신하들과 함께 송도에 도착한 경순왕은 태조 왕건의 환영을 받으며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지니
이는 태자보다 높은 서열 2위로 신라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최초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되었으니 훗날 사심관 제도의 시작입니다.
이후 왕건은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결혼시켰고 경순왕 사촌누이는 왕건과
결혼하니 4부인 신성왕후 김 씨입니다.
그리하여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었으며, 또한 3대 정종과 4대 광종이 모두
낙랑공주와 친남매 간이니 처남 매부지간인 것입니다.
신라 경주를 벗어난 유일한 신라 왕릉
귀부한지 43년 만인 978년(고려 경종 3년),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고 경순왕이 승하하니
소식을 접한 신라유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였으며
경순왕의 운구를 모시고 장례를 치르러 경주로 가려는 행렬이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아쉽게도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운구 행렬은 정지됩니다.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혹여나 신라 유민들이 동요하거나 민중 봉기가 있을까 우려한
고려 조정은 '왕의 구(柩)는 도성에서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국법이라며 운구 행렬을
멈춰 세우니 그 장소가 지금의 임진강 고랑포 미치지 않은 곳이며 결국 경순왕은
더는 남하하지 못하고 근처 나지막한 언덕에 모셔졌습니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 묻히게 된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되고 말았는데 1727년(영조 3년)에
후손이 '敬順大王葬地(경순대왕장지)'라는 6자가 새겨진 지석을 발견하고 상소를 올려 왕명으로
릉(陵)을 정비하고, 장단부(長湍府)에서 매년 봄·가을로 제향(祭香)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또 잊혔는데 왕릉이 위치한 이곳이
휴전선과 가까운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는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졌습니다.
그렇게 또 잊힌 채 지나던 중 1973년 이 지역을 관할하던 중대장이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
비석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나타난 경순왕릉은 1975년에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고 경내 일원을
보수, 정비하였으며 협소하나마 능역은 민간인통제선에서 해제시킴으로써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배 및 답사를 할 수 있습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입니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습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합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2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순왕릉 앞에서의 절친 단체 사진
경순왕릉 출입 통로 휀스에는 지뢰표식이 붙어 있는 탓에
이 지역이 최전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