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천안문광장과 고궁박물원.2 (2018.9.20)
보화전 전경
보화전(바오허뎬)은 황제의 도서관이자 각종 행사를 치르던 연회장으로 원래 명칭은
근신전(谨身殿)으로 청대 들어서 보화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전각 중앙의 보좌 위쪽에는 청나라 제6대 황제인 건륭제가 직접 쓴
"황건유극(皇建有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자금성 안의 건물은 크게 남쪽 구역인 외조(外朝)와
북쪽 구역인 내정(內廷)으로 나누어집니다.
외조(와이차오)는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곳이며 내정(네이팅)은 황제의 가족이
생활하던 곳으로 외조와 내정 모두 중요한 건물들은 주로 중앙축에 있다.
외조는 황제가 정무를 보던 구역으로 자금성 남부를 넓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물은 태화전(太和殿)과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삼대전(三大殿)으로
태화전(타이허뎬)은 황제가 관료들을 만나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입니다.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금란전(金棄殿)이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는
중국 최대의 목조 건물이기도 합니다.
외부는 웅장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주며 실내는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과 구조가 특징으로
건물 전체에 다양한 상징물이 조각되어 있으며 특히 천장과 옥좌, 들보 등 많은 곳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태화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태화문(太和門)이라 하며 자금성 정문인
오문을 지나 태화전 전면에 있습니다.
자금성 이름의 유래
자금성(쯔진청)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자주색의 금지된 성(紫禁城)’으로 그중 ‘자(紫)’는
천구의 북쪽을 가리키는 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천제(天梯)가 자미원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극성을 포함한 별자리인
자미원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천제가 거주하는 하늘의 궁전을 '자궁(紫宮)'이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을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라 칭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금성의
‘자(紫)’는 황궁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나타내며 자금성의 ‘금(禁)’은 금지한다는
뜻으로 황제가 기거하는 곳인 만큼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궁 항공 촬영사진 (※참고자료)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릅니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으며 궁궐 주위의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습니다.
고궁 안내도
1420년부터 1644년 동안 자금성은 명 왕조의 중심지로 1644년 4월에 순 왕조의 황제라고
자칭한 이자성의 반란으로 자금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그는 자금성의 일부분을 불 지르며 명의 장군 오삼계와 만주 군이
합쳐진 군대가 도달하기 전에 피했습니다.
10월까지, 만주군은 중국의 북쪽에서 패권을 주도했고, 의례는 어린 세조 황제가
중국이 청 왕조의 지배하에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거행됐습니다.
청의 지배자들은 몇몇 주요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패권”보다는 “조화”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이름에 두 개의 언어가 섞여있게 만들었습니다.(중국어와 만주어)
또한 궁궐에 샤머니즘적 요소를 소개했으며 1860년에, 2차 아편전쟁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자금성을 차지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점령했습니다.
1900년에 서태후는 다음 년도까지 자금성이 군대에 의해 점령되도록 내버려둔 채
의화단 사건 동안 자금성을 도망쳤습니다.
24명의 황제의 거처가 되고 나서-14명의 명 황제와 10명의 청 황제-자금성은 1912년에
푸이(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퇴위로 중국의 정치적 중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새로운 중국 정부의 동의로, 외전은 공용으로 넘겨진 반면, 내전엔 1924년에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 까지 푸이가 지냈습니다.
보화전에서 바라다 본 후면의 태화전과 전면의 중화전 전경
태화전 전경
자금성은 명나라 시대 북경천도를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정난의 변을 통해 즉위한 영락제는 기존 수도인 남경(난징)보다 자신의 세력 기반인
북경(베이징)이 수도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북경은 영락제가 즉위하기 전
그의 영지였던 곳으로 당시 명칭은 북평(北平)이었습니다.
영락제는 즉위한 뒤 북평의 이름을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바꾸고
관련 기구를 설치하며 천도를 준비했습니다.
1406년 영락제는 북경에 자금성의 건설을 명령했는데 1410년 이후로는 건설에 쓸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운하를 정비하고 3천여척 가량의 작은 배를 증설했습니다.
자금성 건설에는 수십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1420년 완공되었는데 1421년 영락제는
정식으로 명나라의 수도를 북경으로 정하였습니다.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쳐 600년 가까이 24명의 황제가 자금성에서 살았습니다.
중화전과 태화전 후면
지붕마루 전경
태화전 측면
태화전 지붕마루를 살펴보면 11개의 잡상이 설치되어 있음
건청문 전경
태화전 후면에서
태화전 앞에서 태화문을 배경으로
태화전은 3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3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습니다.
태화전 앞 답도(踏道)는 9마리의 용이 조각된 구룡교(龍九橋)이며, 월대에는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일구(日晷)와 가량(嘉量),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거북과 청동학 (등에 뚜껑이 있는 향로),
동정(銅鼎, 향로) 18개가 있고, 지붕 처마에는 11개의 잡상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보화전 후면에서 건청문을 배경으로
외조와 내정을 구분하는 보화전 후면 계단에서 건청문을 배경으로.....
3단으로 된 기단에는 용머리가 장식된 배수구
수많은 용머리배수구 전경
건청문의 사자상 전경
건청문 앞 황금사자상은 귀도 덮여 있고 눈도 가려져 있는데 이 깊은 속내는
이 내정은 황제가 생활하는 개인적인 생활공간이니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는
뜻으로 이 내정에서 만큼은 정치를 떠나 휴식을 취하는 사적인 공간임을
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쪽의 한 마리 암사자는 한쪽에 새끼 사자를 발아래 누르고 있고 또 한마리의
숫사자는 발아래 수구를 움켜쥐고 있는데 동쪽 수컷 사자는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고 서쪽의 암사자는 다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내정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던 구역으로 주요 건물은 후삼궁(后三宫)이라 불리는
건청궁(乾清宫),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宁宫)입니다.
넓은 공간이 있는 외조와 달리 내정은 후삼궁 주변에 많은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공적 구역인 외조와 달리 사적 공간이란 점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건청문 앞의 황금사자상 전경
건청문 앞에서 바라다 본 보화전 후면 전경
건청문 담벽의 화려한 목부조상
건청문에서 바라다 본 보화전 후면
건청궁 전경
내정의 중심은 황제가 휴식하던 건청궁(치안칭궁)으로 본래는 황제와 황후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나 청대 옹정제가 건청궁 서쪽의 양심전(养心殿)에 기거하면서 부터는
보조 직무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옹정제 이후로는 건청궁에서 왕실의 손님을 맞이하거나 고위 관료들이 만나는 자리로
활용되었으며 건청궁의 현판은 청나라 순치제가 직접 쓴 것으로 한자와
만주어가 같이 쓰여 있습니다.
건청궁의 용마루와 지붕 장식 전경
건청궁 계단의 화려한 석부조상
건청문 전경
건청궁 앞의 부조물
교태전 전경
교태전 내부 전경( ※ 참고자료)
교태전(자오타이뎬)은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에 있는 건물로 명나라 초기에는
황후가 거처하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주로 황후의 생일에 축하의 예를 받는 장소였으며 시대에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교태전 뒤편에는 곤녕궁(쿤닝궁)이 있는데 명대에는
황제가 황후를 맞는 침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된 바 있으며 청나라 순치제 이후로는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교태전과 후면의 곤녕궁
곤녕궁에서 바라다 본 교태전
곤녕궁의 용마루와 장식들
곤녕궁의 계단에 새겨진 용부조물 전경
곤녕궁 후면 계단의 용부조물 전경
어화원 전경
내정 북쪽에는 황제와 황후를 위한 정원인 어화원(御花園)이 있습니다.
조성 당시 명칭은 궁후원(宫后苑)으로 어화원 중앙에는 황제가 제사를 지내던
흠안전(钦安殿)이 있으며 양쪽으로 정자와 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어화원은 소나무나 측백나무 등 다양한 나무와 기묘한 모양의 바위를 포함해
꽃과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자금성 중심축선에 위치한 후원으로 곤녕궁 뒷쪽에 있어서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 했다가 옹정제 때 어화원으로 개칭했습니다.
동서 135m, 남북 89m, 면적 12,015m²이며 흠안전(欽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어경정(御景亭)·
이조당(璃藻堂)·부벽정(浮碧亭)·만춘정(萬春亭)·강설헌(絳雪軒)이, 서쪽에는 연휘각(延輝閣)·
위육재(位育齋)·징서정(澄瑞亭)·천추정(千秋亭)·양성재(養性齋)·사신사(四神祠)·정정(井亭)·
녹대(鹿臺) 등의 정자·대·누각이 소나무·측백나무·대나무 숲과 괴석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고 경치를 감상하던 곳 입니다.
어화원 동남부에 있는 강설현 화단
과거에는 건물 앞에 해당화 다섯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매년 꽃이 흩날리는 모습이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하여
강설헌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음향정의 처마(※ 참고자료)
만춘정
어화원 내에서 가장 화려한 정자로 유명하며 어화원 동쪽에 있으며
서쪽의 천추정(千秋亭)과 한쌍을 이룹니다.
양심전(養心殿)
건청궁 서쪽에 있는 곳으로 공(工)자 평면에 황색 유리기와를 쓴 헐산정(歇山頂)식 건물로
명나라 가정제 때 처음 건설되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옹정제부터 광서제까지 8명의
황제가 침궁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순치제 (1661.2.5), 건륭제(1799.2.7), 동치제(1875.1.12)가 붕어했고,
강희제가 로마 교황이 보낸 사절을 접견하기도 햇습니다.
또한 동치 연간에 이곳 동쪽의 체순당(體順堂)에서 동태후가, 서쪽의 연희당(燕禧堂)에서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선통제의 아버지 순친왕이 섭정왕으로서 국가대사를
살피는 등 작은 규모에 비해 큰 사건이 많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융유황태후가 선통제의
퇴위 조서에 옥새를 찍은 곳이기도 합니다.
자금성의 북문은 신무문(神武門)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화문(東華門)과 서화문(西華門)이 있습니다.
동화문은 청나라 시대 내각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으로 황제나 황후, 황태후의 관이 나가는
문으로도 쓰여 귀문(鬼門) 혹은 음문(陰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동화문 전경(※ 참고자료)
서화문 전경( ※ 참고자료)
자금성의 서문으로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습니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동화문과 같은 모양입니다.
맞은편에는 황실의 원림인 서원(西苑)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가
서원에 행차할 때 자주 사용했습니다.
1900년(광서 26)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 문을 통해 시안으로 도망쳤습니다.
각루(角樓)
자금성의 궁성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진 건물로 황색 유리기와를 얹은 3층의 전각으로
성벽을 제외한 각루만의 높이는 27.5m입니다.
우리나라 경복궁의 동십자각과 같이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 역할을 합니다.
영락제 때 세워진 이래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각루와 해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