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카이엔타 시가지에 있는 나바조 그늘집 박물관(2018.4.3)

뽀다구 2018. 6. 20. 23:16










나바조 그늘집 박물관 표지판



나바호족은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 부족 중 하나로  이들의 언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나바호족 병사들이 미군에 암호병.

통신병으로 대활약을 하였습니다.


미국 땅의 원주민 부족 중에서 인구 수로는 체로키족에 이어 2위,

 자치국 면적은 전체 1위(약 7만 평방킬로미터)입니다.


땅이 넓다 보니 대부분의 영토가 포함되어 있는 애리조나주와는

 다르게 자체적으로 서머타임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도 원래 터전에서 강제 이주를 당했는데,

이 이주 과정의 이름이 롱워크입니다.


이주 당시에는 척박한 땅이었겠지만, 그 땅이 마침 자연 경관은 뛰어난 곳이

 많아 관광 산업으로도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관광지가 앤털로프 캐년과 모뉴먼트 밸리입니다.


언어 분류학상으로 이들은 남부 아타바스카 언어를 사용하며, 아파치족과 함께 현재의

 캐나다 북서부와 알래스카 동부에서 1400년대에 이주해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캐나다 지역에 남아있는 아타바스카 언어 사용자들은

나바호 족의 언어를 무리없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미국 남서부에서 거주하던 푸애불로족과 에스파냐인들과 접촉하기 전까지,

나바호 족은 사냥,채집으로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다가 푸에블로족에게서 농경 문화를 전수받아 옥수수,콩,호박을 재배하기 시작했었고,

 16세기에 에스파냐 인들과 접촉하면서 양과 염소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고기가 주식으로 포함되었으며, 양은 화폐로 쓰였고

 부의 가치로 인식되었습니다.


양털로는 모직물을 짰는데 현대에도 그 화려한 예술적 가치는 유명합니다.

나바호 족의 사회는 전통적으로 모계사회였었습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재산을 따로 보유, 관리했고 남자가 결혼하면 여자쪽 부족으로

 이주하여 부인과 같이 살았습니다.


 유산은 딸들이 상속하였으며, 자식들은 어머니쪽의 부족을 따랐습니다.


또한 엄격한 족외혼을 실시하였습니다.

















나바조 자치국의 카이엔타 도시전경

















나바조 그늘집 전경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티피에서만

 생활한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티피는 막대기로 기둥을 세우고 가죽을 걸친 텐트입니다.


하지만 나무집을 지어 생활하는 부족도 있었고

흙집을 지어사는 부족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게된 이유로는 지형과 기후의 조건일 수도 있고

 부족의 어떠한 의미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인디언 부족은 3000개 부족이 있는데 어떤 부족이 어떤 집을 짓고

 살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Adobe는 별독집을 짓고 사는 부족으로 푸에블로족입니다.


 이들은 거의 빌라수준의 벽돌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직사각형의 빌라모양은 아니였고

 약간의 피라미드 식이 였습니다.


그리고 위그암은 오두막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longhouse 이거는 말그대로 기다란 집입니다.


통나무로 만든 길다란 집입니다.


그 곳에서 거의 한 부족 전채가 생활했다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크고 길겁니다.


마지막으로 earth lodge 는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그냥 제 생각인데 일단 earth는 지구 즉 대지를 뜻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지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특별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이들은 대지를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대지를 말할땐 어머니 지구, 어머니의 가슴 ,대지 어머니 이런식으로

 표현을 하면서 함부로 땅을 파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행위는 어머니의 가슴을 파해치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earth를 붙인것 같아 보이고 lodge 이것은 임시로 거처하는 천막인데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한 곳에 정착생활을 하지않고 방목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텐트 형식의 티피 같은곳에서 생활했습니다.


 아마 earth lodge 이것도 티피와 비슷한 형태의 가옥일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내부 전경

















이 곳 불모지 사막에 자생하는 향나무원목을 이용하여

 뼈대를 만든 후 흙을 이용하여 만든 움집 형태



















이렇게 크기가 다양한 이유는 정확하게 어떤 제작 기법이 규격화가 이루워진것이 아니라

 가족 수에 따라 크기가 다룰 수가 있었고 사냥 활동에 따른 이동에 용이하기 위한

 고려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모양은 다양합니다.






























카이엔타의 버거킹 전경



사실 모뉴먼트 밸리를 돌아 보고 이 곳으로 온 이유는

 버거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나바조 인디언 자치국 영내이다보니 식사장소가 마땅하지 않기에

간단하게 미국식으로 점심을 해결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곳에 나바조 그늘집 박물관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아마도 버거킹 사장과 바로 옆 호텔 사장이 협심해서 만든

무료 벅물관이었습니다.
















이 버거킹을 운영하는 나바조 인디언 사장은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인지라

 식당내에 이런 작은 기념관을 꾸며 나바조 인디언들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바호어: Diné bizaad

Athabaskan어족의 Na-Dené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2011년 기준

 원어민 수가 169,359명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영어로는 도저히 똑같은 소리값을 찾을 수 없는 자음들과, 기본적인 4개의 모음을

 가진 언어로 각각의 모음은 비음, 소리의 장단, 성조로 구분됩니다.


어순은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며 동사변화가 굉장히 심한 언어입니다.


이 언어는 생소한데다가 발음하기도 까다로워서
과거 미국의 백인들 중에서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었습니다.


미국의 백인들도 이 상황이니 미국 외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는

 이 언어를 아는 사람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나바호어 자체를 암호로 활용하기로 하고,

 나바호족에게 선교 활동을 하던 몽고메리 목사를 통해 나바호족 젊은이들에게

 입대할 것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입대한 나바호족들은 나바호어에 기초한 암호체계를 만들었고,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암호병·통신병으로 맹활약하였습니다.


 이들 덕분에 미군이 적국에 기밀을 누출시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 나바호족 병사가 있을 경우 전투 중 고립된 미군 부대끼리

 서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상대방이 미군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 나바호족 병사로 통신할 것을 요구해서

 통신에 성공하면 미군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영화로는 윈드토키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나바호어를 아는 사람들이 옛날보다는 많아져서 암호로 쓸 수 없습니다.


 또 어차피 오늘날은 컴퓨터를 통한 암호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통한 암호의 필요성이 많이 줄어들기도 하였지만.....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암호로 사용한 다른 예로는 중일전쟁 당시 중국이

 원저우 방언을 쓰는 원저우 출신 병사들을 연락병으로 기용한 예가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도솔산 전투에서 북한군이 해병대의 무전기를 노획하자

해병대는 제주도 출신 장병을 통신병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대응,

제주도 방언으로 북한군을 벙찌게 만든 사례가 있습니다.


나바호족 병사들은 작전중이 아니면 부대 안에서 나바호어를 절대로 쓰지 못하도록 강요받았고,

 심지어 막사에 있을 때는 같은 미군으로부터 나바호어를 썼다는 이유로 비누로 혀를 씻기는

 기합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나바호어가 군사 암호로 쓰이는 언어인만큼 미군 지휘부로써는 기밀 유지를 위해서

작전 수행 중이 아니면 나바호어를 쓰지 못하도록 통제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누로 혀를 씻긴 행위는 

분명히 가혹행위가 맞습니다.














미국땅의 진짜 주인으로 이민족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겨 버리고 이들이 점령자들에게

 받았을 차별이란게 어떠했었는지는 생각지 않더라도  이 들이 그 들의 전쟁이 아닌

 강대국들의 영토전쟁에 이용되면서까지 받았던 차별에 대하여 이 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이었는지  참 애처롭기만 합니다.  


이런 탓에 이 들의 이런 용맹심은 온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이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는 다시 엔돌로프캐니언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