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불타바강의 석조 보행자 전용다리 카를교(2017.9.16)
카를교 난간에 걸쳐 앉아 포즈를 취해주던 아름다운 오스트레일리아 소녀
프라하의 유일한 보행자 전용 다리이자 체코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석조 다리 카를교 전경
카를교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교탑(유로전망대 운영)
카를교 교탑은 1357년 카를 4세에 의해서 카를교와 함께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습니다.
아치형의 문은 체코 왕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의미하지만 옛날에는 격자 무늬의 철문이 있어서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적인 역활도 했으며 통행료를 받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카를교를 내려다보고 프라하 성을 바라다 보는 전망대로 오픈하고 있습니다.
① 성 비트(sv. Vit)[성 비투스(St. Vitus)]
② 카를 4세(Kral IV)[찰스 4세(Charles IV)]
③ 바츨라프 4세(Václav IV)[벤체슬라스 4세(wenceslas IV)]
④ 성 보이테흐(sv. Vojtěch)[성 아달베르트(St. Adalbert)]
⑤ 성 지크문트(sv. Zikmund)[성 시그문트(St. Sigmund)]
하단부 독수리문장과 사자문장은 보헤미아의 문장
불타바강 선상 크르즈 코스 안내도
카를 4세 동상
카를 4세는 당대의 가장 교양 있고 외교술에 뛰어난 군주로 알려진 인물로
무력사용보다는 외교로 원하는 바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의 재위 때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의 치세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 제국의 제위는 보헤미아 왕에게
귀속하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었다고 합니다.
1341년 보헤미아 왕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346년 왕위에 올랐으며 같은 해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루트비히 4세를 대신해 독일 왕위에 올랐으나, 루트비히 4세의 저항으로 2명의
독일 왕 중의 하나에 머물렀습니다.
루트비히가 죽고, 남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특권을 주는 등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독일의 유일 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재위시절에 신성로마제국의 법령의 일종인 금인칙서를 공표했고, 예술과 과학의
관대한 후원자로서 특히 프라하의 예술을 후원하였습니다.
카를은 보헤미아 왕인 룩셈부르크의 얀과 보헤미아의 마지막 토착 군주의
누이 엘리자베트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었습니다.
1323년에 그는 프랑스 궁정으로 가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누이 블랑슈와 결혼했으며
파리에서 미래의 교황 클레멘스 6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1330년 아버지에 의해 룩셈부르크로 불려갔고 1331년에는 아버지가 일시적으로 북부 이탈리아에
획득한 영토의 행정을 도맡았으며 2년 뒤 아버지에게서 모라비아의 변경과 보헤미아의
총사령관에 임명받았습니다.
자서전에서 카를은 저당잡힌 왕실의 성, 도시, 저택을 도로 찾고 군대를 양성하여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세력을 키워놓은 귀족들의 영향력을 억제하였으며
행정치리 능력이 뛰어나 아버지의 의심을 사 1335년에 해임당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한 뒤에는 보헤미아 국외에서 임무를 맡았으나 그의 정치적
·외교적인 능력은 얀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1341년 눈이 멀게 된 얀은 카를을 후계자로 삼아 성직자, 귀족, 젠트리, 왕실 도시 대표자들,
브레슬라우의 사절들의 회의에 참석시켰고, 1343년에는 국가의 행정을 맡겼습니다.
1년 뒤 카를의 노력으로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프라하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킴으로써
보헤미아에 종교적 자율권을 주었으며 동시에 카를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장크트비투스 성당의
머릿돌이 보헤미아의 수도에 있는 흐라차니 구릉에 놓여졌습니다.
한편 교황에 의해 파문당한(1324) 독일 왕 루트비히 4세 대신 카를을
독일 왕으로 선출하려는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를은 교황이 요구하는 모든 선서를 다 하고 1346년 7명의 선제후 중
5명의 표를 얻은 뒤에야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오컴의 윌리엄은 카를을
"성직자의 왕"(rex clericorum)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카를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 자신에게
왕권이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카를4세 동상 후면 건물은 천주교성당으로 St. Francis Of Assissi Church
(Kostel svatého Františka z Assisi)
전면에 보이는 건물은 천주교 성당 Church of St. Salvator
(Kostel Nejsvětějšího Salvátora)
카를교는구시가지와 말라스트라나를 이어주는, 체코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돌(석조) 다리입니다.
블타바 강 위에 세워진 다리 중 유일하게 보행자 전용 다리이면서 프라하 성, 천문 시계와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관광의 중심으로 전체 길이는 약 520m, 폭은 약 10m이며
30개의 성상들이 좌우 난간에 각각 마주보며 서 있습니다.
말라스트라나쪽과 구시가지쪽으로 양끝으로는 고딕 양식의 교탑이 각각 서 있고 카를교 위의
성상들은 원본도 있지만 복제품도 마치 원본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복제품의 원본은
국립 박물관과 비셰흐라드 포대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카를교 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드는데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들과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 그리고 발길을 멈추게 하는 거리의 음악가들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합니다.
또한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은 늘 소원을 비는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블타바 강에 처음 세워진 카를교는 10세기경 쯤에는 나무로 만든 목조 다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와 프라하에 대홍수가 나면서 블타바 강의 물이 넘쳐 다리가 쓸려나갔고
12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유디트교는 독일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돌다리였지만
200년 후인 1342년 겨울에 생긴 얼음 덩어리로 인해 다리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이후 1357년 카를 4세가 프라하 성 내 성 비트 대성당을 건축했던 건축가에게 이 카를교의
재건축을 맡겼고, 그는 겨울에 얼음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다리 밑을 거대한 교각으로
받치게 만들고 달걀 노른자를 섞어서 돌과 돌 사이를 접착시키는 공법으로 매우 강하고
튼튼한 다리로 1407년에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카를교로 진입하여 구시가지 방향으로 바라다 본 교탑전경
카를교에서 바라다 본 불타바강 상류의 박물관(Bedrich Smetana Museum) 옆 전경으로
그 박물관 바로 위쪽에 노천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 곳에서 바라다보는 불타바강변의
경치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 카를교의 야경이나 불타바강변의 경치를 사진에 담기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체코 불타강의 화려한 야경은 카를교 교탑 바로 옆 상가 안쪽 건물내의 통로길을 따라
건물 상가가 끝나는 지점까지 가시면 나타나는데 저도 오늘 저녁에 그곳에서 불타바강 야경을
그 곳에서 볼 예정인지라 다음에 올릴 글에서 보시면 그 곳 분위기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카를교 위의 석상 위치도
성 얀 네포무츠키(존 네포묵)[Sv. Jan Nepomucký(St. John Neopmuk)]
체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가톨릭 성인으로 1380년 성 비트 성당의 제단 성직자를 지낸 뒤
1383~1387년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고 프라하로 돌아와 1389년 프라하
대주교 대리를 거친 후 1390년 성 하벨 교회의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3년 뒤인 1393년 3월 20일 바츨라프 4세 왕(카를 4세의 아들)에 의해서 암살당하게 되는데
암살당한 이유로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옵니다.
바츨라프 4세 왕은 전쟁으로 성을 자주 비웠는데, 이때에 왕비가 호위병과
바람이 나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비가 그 죄책감을 못이겨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그 이야기가 바츨라프 4세의 귀에도 흘러들어가게 되고, 왕은 얀 네포무츠키 신부를
추궁하여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끝까지 사실에 대해 입을 열지 않자 왕은 신부의 혀를 자르고
돌을 매달아 카를교 위에서 블타바 강으로 내던져 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나라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어느날 블타바 강 위로 5개의
별이 뜨고 그 별들이 떠 있는 곳에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시신이 떠올랐고, 그의 시체를
건져내어 성당에 안치하자 좋지 않았던 일들은 점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온 나라에 퍼져 나가면서 국민들은 점점 그를 숭배하게 되었고
1729년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십자가를 안고 머리엔 다섯 개의 별이 떠있는
형상으로 다리를 지키는 수호 성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얀 네포무츠키 신부의 성상은 카를교 위 30개의 성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유일하게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리의 수호신답게 카를교 위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다리에서도
얀 네포무츠키 성인상을 자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바츨라프 4세 왕 시대에 대교황청이 프라하에 있었는데 왕과 교황청이
끊임없는 분쟁으로 격돌하게 되자 왕이 대주교를 잡아들이려 하는데, 도망간 대주교 대신
대주교 대리였던 얀 네포무츠키 신부만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고문을 받던 중 죽은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블타바 강으로 던져졌고 그후 30년 후인 1729년
종교적인 희생양이었던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얀 네포무츠키 성인으로 추대되었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 중 후자 쪽의 이야기가 좀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얀 네포무츠키의 이야기를 담은 동판
1683년 성 얀 네포무츠키
[Sv. Jan Nepomucký(=St. John of Nepomuk)]
성 루드밀라[Sv. Ludmila(=St. Ludmila)]
복제품으로 원본은 비셰흐라드 포대에서 보관
1708년 성 아우구스틴[Sv. Augustin(=St. Augustine)]
복제품으로 원본은 비셰흐라드 포대에서 보관
1715년 성 필립 베니치우스[Sv. Filip Benicius(=St. Philip Benizi)]
성 노르베르트, 성 바츨라프, 성 지크문드
[Sv. Norbert(=St. Norbert), Sv. Václav(=St. Wenceslas),
Sv. Zikmund(=St. Sigmund)]
1708년 성 아우구스틴[Sv. Augustin(=St. Augustine)]
복제품으로 원본은 비셰흐라드 포대에서 보관
1709년 성 카예탄[Sv. Kajetán(=St. Cajetan)]
1709년 성 보이테흐[Sv. Vojtěch(=St. Adalbert)]
복제품으로 원본은 비셰흐라드 포대에서 보관
1714년 성 비트[Sv. Vít(=St. Vitus)]
1712년 성 빈첸츠 페르라르스키, 성 프로코프
[Sv. Vincenc Ferrarský(=St. Vincent Ferrer), Sv. Prokop(=St. Prokop)]
성 루드밀라[Sv. Ludmila(=St. Ludmila)]
복제품으로 원본은 비셰흐라드 포대에서 보관
1714년 마트히의 성 요한, 발로이스의 성 펠리스, 성 이반
[Sv. Jana z Mathy(=St. John of Matha),
Sv. Felixe z Valois a Ivana(=Felix of Valois and Ivan)]
1861년 예수 수난 십자가 - 칼바리에
[Kalvárie(=Calvary)]
히브리어로 "거룩, 거룩, 거룩한 주여"라는 메시지가 쓰여 있는 십자가상
카를교위의 악사들
카를교 하류쪽 마네수프교 전경
상류의 Bedrich Smetana Museum 쪽 전경으로
하단부 보 바로 옆 돌출부가 뷰 포인트랍니다.
상류쪽 보가 끝나는 오른쪽 지점의 하얀 건물은 Sovovy Mlýny로 바로 밑 강변에
노랑 펭귄들이 설치되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랍니다.
오른쪽 하얀 건물 하단의 건물은 리히텐슈타인 궁전
카를교에서 파노라마로 찍은 전경
카를교에서 보위 상류 모스트 레기이교를 줌으로 당겨 찍은 전경
불타바강 상류의 오른쪽 공연예술극장(National Theatre)
얀 네포무츠키 성인이 순교를 당했던 자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온 아름다운 소녀로 제가 사진 모델 좀 혀 달라고
영어로 부탁을 하였더니 저를 보고는 단 번에 한국 사람으로 알아보고는 뜬금없이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하여 저를 깜짝 놀라게 하였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한국 이민자들에게 가벼운
한국말을 약간 배운 탓에 저도 무척 방가워서 잠시 환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엔 없었답니다.ㅎ^^*
오스트레일리아 소녀가 찍어 준 부부사진
말라스트라나 방향의 교탑
말라스트라나방향의 교탑전경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오르간이 보관되어 있는 성 니콜라스 성당 전경
( Church of St. Nicholas , Chrám sv. Mikuláše)
성 니콜라스 성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손꼽히며 1787년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였습니다.
1791년 모차르트가 생을 떠난 지 3일 뒤에 이곳에서 가장 먼저 장례 미사가 진행되었으며
지금도 모차르트가 연주한 오르간이 성당 안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 미쿨라셰(니콜라스)[Sv. Mikuláše(St. Nicholas)]는 어린이들의 수호 성인인
성 미쿨라셰는 270년 소아시아 지방(현재의 터키) 리키아의 파타라시에서 태어났으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가 원래 이름입니다.
후에 대주교가 되었던 미쿨라셰는 자신의 재산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몰래 도와가며
남에게 선행을 베풀고 어린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냈다는 점에서 지금의 산타클로스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310년 성 미쿨라셰가 죽은 뒤 그가 죽은 날을 기념하고자 12월 6일 ‘성 미쿨라셰 데이’가
생겨나고 그날은 그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16세기에 신구 개혁으로 인해 ‘성 미쿨라셰 데이’는 유럽 지역에서 사라지지만
네덜란드에서 만큼은 이 날을 계속 유지했고 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미국 전체로
이야기가 확산되어 ‘성 미쿨라셰’라는 이름이 ‘산타클로스’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이날이 아기 예수 탄생일과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12월 24일로
날짜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12월 24일 어린이에게 선물을 하는 날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12월 6일 체코는 법정 공휴일은 아니지만 ‘성 미쿨라셰 데이’라 하여 3명이서
짝을 이루어 성 미쿨라셰와 천사와 악마 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12월 5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6일까지 계속된다고 합니다.
체코 프라하 말라스트라나지역의 지도
말라스트라나는18세기 귀족들의 궁전이 많이 남아 있는 곳
(Little Quarter , MALASTRANA)
구시가지에 이어서 두 번째로 역사가 오래된 말라스트라나 지역은
블타바 강과 프라하 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8세기에는 주로 시장이 서던 자리로 13세기에 들어와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는 도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16세기 말에는 대화재로 사라졌던 말라스트라나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재건되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귀족들에 의해서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현재 그 건물들은 대부분 정부 부처와 각국의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오래된 옛 건물들도 많이 남아 있어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정취를 더합니다.
Bedrich Smetana Museum에서 찍은 불타바강의 전경
카를교에서 찍은 Bedrich Smetana Museum
Bedrich Smetana Museum에서 찍은 카를교 전경으로 프라하의 야경은 우측의 하얀 현수막이
걸려 있는 노천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 위주로 올려드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