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두브로브니크 성안의 구시가지 풍경들(2017.9.11)

뽀다구 2017. 11. 3. 02:48










두브로브니크 성이 바라다 보이는 항구쪽  전경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 해 남쪽 연안에 있으며 크로아티아의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힙니다.


거의 석회암으로 덮여진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곶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항구의 해안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거대하고 둥근 탑이

 육지 쪽에서 이 도시를 굽어보고 서 있습니다.


대부분 2겹으로 지어진 성벽은 오래전부터 이곳의 자랑이었는데 성벽 너머로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별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도시의 초기 도시 계획은 1292년의 화재 후 항구를 다시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1272년까지 라구사의 라틴 섬과 두브로브니크의 숲속 거주지를 나누어 주는 습지대였던

 계곡을 따라서 이곳의 주도로인 스트라둔이 쭉 뻗어 있고, 그 길 양 옆으로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작은 숲(dubrava)을 뜻합니다.


성벽 안에서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스트라둔을 제외한 구도시는 대부분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좁은 길들만 나 있어 도시 전체가 그림 같은 미로를 이루고 있습니다.


14세기에 지은 2개의 수도원이 도시 양쪽 끝에 서 있는데,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

 서쪽 입구를 지키고,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이 동쪽 통로를 맡아 지켰습니다.



렉터 궁전은 달마치야 건축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고 앞 바다에 있는

 로크름 섬은 정원과 오렌지나무로 유명합니다.


 해마다 여는 예술축제를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경치 좋은 이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이곳은 사라예보와 베오그라드까지 철도로 연결되어 있고 그루지 가까이에 새로 형성된

 항구에서 달마치야의 다른 항구들과 이탈리아까지 정기선이 운항되고 있습니다.


 주요산업으로는 리큐어 주(酒), 치즈, 비단, 가죽제품 제조업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도시는 7세기에 에피다우루스가 슬라브와 아바르를 약탈했을 때 도망나온 로마 피난민들이

 동남쪽 지역에 자리잡고, 이름을 라우사 또는 라구시움이라고 부른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슬라브의 식민지인들도 이 곳의 로마인들과 합쳐져 일찍부터 이 도시는 2개의 위대한 문명을 잇는

 역활을 하였는데 로마가 망한 후, 비잔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9~12세기에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쳤으나 1205~1358년에는 대부분의 독립권을 갖고서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망명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영국의 리처드 1세도 있었습니다.


 또한 이 도시 공화정은 조약을 맺거나 공물을 바쳐 영토를 달마치야 해안까지 넓혔습니다.


 비잔틴에서 도나우 지역까지 닿아 있는 육상 교역로가 끝나는 바닷가에 있어 상업이

크게 번성하였고 라구사의 육로 무역은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 번창했습니다.


1420년 달마치야가 베네치아에 팔렸지만 두브로브니크는 이름만 빼고 모든 점에서 자유도시 그대로 남았는데

 수세기 동안 이곳 사람들은 동·서양 사이에서 책략을 발휘하여 독립을 잃지 않았습니다.


투르크와 전략적인 협정을 맺어 오랫동안 자유를 지키면서 오스만 제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6세기에는 인도 및 아메리카 대륙과 교역을 했으며, 1588년 영국을 침공하는

스페인에 군대를 지원했으나 그 공격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15~17세기에 예술과 문학이 크게 발전해 '남부 슬라브의 아테네'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남부 슬라브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곳 사람들의 말이 문학작품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룬 업적이나 상업에서 얻은 성과는

 이 도시의 문학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1667년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주민의 1/5 정도가 죽었으며

그 후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한번 옛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1800~05년 이곳은 지중해에서 단 하나뿐인 중립국으로 교역에서 많은 몫을 차지하였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 1세가 이곳을 점령했고, 1815년에는 빈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가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1991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끝난 후에는 크로아티아 영토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를 침공한 세르비아 군대가 두브로브니크를 포위하고 포격을 가해 

도시의 건물 상당수가 파괴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 세계의 학자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 두브로브니크를 지켰으며 전쟁 후 유네스코 등의 지원을 통하여 대부분 유적들이

 복원되었습니다.
















드브로브니크 성안 구시가지 지도














요약된 드브로브니크 성안 구시가지 지도

















하늘에서 촬영한 드브르브니크 성안 구시가지 전경으로

위의 지도와 비교해보시면 이해가 빠릅니다.(참고 자료)





















 목재 출입문이 있는 집이 꽃보다 청춘에서 고 김자옥과 일행들이 2층에 묵으면서

이 출입문을 통하여 드브로브니크 구도시를 돌아 보았다고 합니다.
















"꽃보다 청춘"에서 고 김자옥과 일행들이 묵었던 2층집 전경으로 이 곳에서 지근거리에  

드브로브니크 플로체 정문이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성 풀로체 정문 근처에서 바라다 본 스르지산 전망대 









 









플로체 성문



4륜자동차 투어로 스르지산전망대를 돌아 보고 내린 곳은

 두브로브니크 구도시 플로채 성문 앞이 었습니다.


이 곳에서 내린 이유는 이 근처 해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 때문에 이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혹여 구도시 성벽내에서 길을 잃더라도 정해진 시간까지 이 곳으로 오면된다는.....,ㅎ


암튼 이런 탓에 우리는 이 곳 플로채로 두브로브니크 구도시로 진입을 하게 됩니다.
























뒤로 돌아 바라 본 두브로브니크 성  풀로채 출입문 전경으로 삼중으로 성문이

만들어져 있어서 무척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 구도시 안내도



















길거리 악사들

















핸드 메이드 민속제품을 파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상인
















항구를 향하는 성벽 포구멍


















루자광장의 올란도 기둥
















성 불라이세 성당 전경



14성인 중 한 사람이자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를 기리는 성당으로

 루자 광장 올란도 기둥 뒤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4세기 처음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지만 17세기 대지진과

 18세기 대형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블라이세 성인은 10세기 두브로브니크에 침투하려고 온 베네치아 선박이 위장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지도자에게 알려 도시를 살렸고, 생선을 먹다 가시가 목에 걸린 아이를 살린 치유의

 성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성인 조각상의 한 손에는 대지진 전의 구시가 성벽의 모습을

 나타낸 조각품이 들려 있습니다.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



















성 블라이세 성당의 외부 조형물들 





















종탑 전경

















루자광장에 있는 루자건물


















스폰자궁전앞에서 연주를 하는 합주단


스폰자 궁전은 16세기 초반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과 후기 고딕 양식이 합해진 건물로

 17세기 중반 대지진에도 피해 없이 살아남은 몇 개 되지 않은 곳 중 한 곳입니다.


 경제 중심지였던 곳인 만큼 건축했을 당시에는 물건을 거래하던 장소로 사용되었고,

 그 후 조폐국, 은행, 세관 등으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1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고문서와

 역사를 기록한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 기록 보관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내전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영사실과 내전 당시 희생된 희생자들을

 기리는 전시실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폰자궁전 앞의 루자광장 전경
















작은 오노프리오스분수

















루자광장 전경으로 오른쪽이 스폰자궁전
















루자광장 전경



필레 문과 이어진 플라차 대로의 한쪽 끝에 자리한 광장이 바로 ‘루자 광장’입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종탑, 렉터 궁전, 스폰자 궁전, 성 블라이세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35m 높이의 종탑을 지나면 플로체 문과 이어지고, 광장 중앙에는 ‘올란도(Orlando) 기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올란도는 14세기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맞서 싸웠던 영웅으로 올란도의 팔뚝 길이인

 51.1cm가 두브로브니크 길이의 단위인 1엘(ell, 두브로브니크 표준 단위)이기도 합니다.


구시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 대부분은 이곳 루자 광장에서 열리며, 밤낮으로 

거리 악사들의 연주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숙소를 잡을 때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소음을 피하고 싶다면

 루자 광장 주변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면의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성모승천 대성당) 전경















렉터궁전 전경


1272년 처음 건축되었지만 1435년 화재로 인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1667년에는 대지진으로 파괴되면서 또 한 번의 재건을 통해 지금의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었습니다.


 다양한 건축 양식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크네베브 궁전(Knežev dvor)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렉터 궁전(Rector’s Palace)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렉터’는 ‘최고 통치자’라는 뜻으로, 궁전은 두브로브니크 시의 행정을 맡았던

 최고 지도자의 집무실이었고, 두브로브니크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궁전 정면에는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6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 안뜰에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던 선장이자 자선 사업가로 알려진 ‘미호 프라차트’의 청동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엄청난 재산을 국가에 기증했는데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638년에 동상을 세웠고 안뜰에서는 여름 축제 때 클래식 공연이 열립니다.

















렉터궁전 출입문위의 조형물















정면에 바라다 보이는 스폰자궁전















성모 승천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은 12세기 두브로브니크 인근 로크룸 섬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었지만 다행히 구조된 영국의 리처드 1세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한

 헌금으로 원래 있던 교회 자리에 증축해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17세기 대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고 바로크 양식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당 안 보물실에는 성 블라이세의 유물과 두브로브니크의 금 세공사가 만든 금 세공품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탈리아 화가였던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과 라파엘로의

‘마돈나’라는 작품도 볼 수 있습니다.


















두브로브니크 구도심에서 바라다 본 스르지산 전망대 전경













군둘리체바 폴야나 광장으로 두브로브니크 유일의 노천 시장



플라차 대로에서 성 블라이세 성당 바로 옆 골목으로 진입하면 작은 광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군둘리체바 폴야나 광장입니다.


 광장에서는 매일 노천 시장이 열리는데 대부분 과일이나 야채, 농산물 가공품,

 비누, 오일, 말린 과일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구시가지 내에서는 유일한 노천 시장이기도 하며, 이곳 성벽 안에 있는 유일한 마트,

콘줌(Konzum)이 있으니 아파트먼트에 숙박을 하신다면 이 곳에서 다양한 먹거리

재료들을 구입하시면 된답니다.




















두브로브니크가 유고 내전 때 포격맞은 그 모습 그대로 개인이 살고 있는 가옥 전경

(괴짜가 살고 있는 개인박물관)




















오노프리오스 분수 전경으로 성안 구시가지에 식수를 공급하는 분수


필레 문을 통과하면 플라체 대로가 시작하면서 한눈에 들어오는

 특이한 모양의 분수가 바로 오노프리오스 분수입니다.


 비가 잘 내리지 않는 두브로브니크에서는 항상 물이 부족하였는데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1438년 스르지산에서 물을 끌어 만든 거창한 수도 시설의 일부랍니다.


분수를 만든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건축가인 ‘오노프리오’의 이름을 따서 오노프리오스 분수라

 불리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식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대지진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돔 모양의 지붕 아래 16각형 면마다 수도꼭지가 있는데,

각기 다른 사람의 얼굴과 동물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필레 문(Gradska Vrata Pile)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3개의 문 중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이중문입니다.


 16세기 중반 만들어진 첫 번째 문을 통과하면 계단 또는 내리막길이 나오고 15세기 중반

 만들어진 두 번째 문은 플라차 거리와 바로 연결됩니다.


 두 개의 문에는 모두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인 성 블라이세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플라차 거리 끝에는 또 다른 문인 플로체 문이 있고, 필레 문과 플로체 문 사이에

 스르지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부자 문이 있습니다.


버스 터미널이나 페리 터미널, 공항에서 시내버스로 들어오는 경우

 모두 필레 문 앞에서 하차하면 됩니다.


 관광 안내소도 필레 문 밖 버스 정류장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복장을 한 공연자가  플라차 대로(Placa Stradun) 한구석에서

 오고가는 관광객들을 바라다보는 전경 


 플라차 대로는 구시가지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필레 문을 통과하면

 플라체 대로가 시작됩니다.


필레 문을 통과하면 종탑 앞 루자 광장까지 이어지는 300m의 큰길이 바로 ‘플라차’라고 부르는 길로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길’이란 뜻의 ‘플라차’는 베네치아어로 ‘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스트라둔’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 집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대로지만 그 전에는 바닷물이 흐르던 운하였으며,

돌을 사용해서 포장길을 만든 것은 1468년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 대지진 후 다시 복구하면서 지금처럼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깔았습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기념품 가게, 카페,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구시가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입니다.
















프란치스코교회수도원 박물관 전경(유료)
















프란치스코회 수도원(Franjevački Samostan)의 피에타상(무료)













프란치스코교회 수도원 전경으로 (수도사들이 세운 수도원)


1234년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들이 두브로브니크에 정착한 뒤 1317년 성벽 안에

수도원을 세웠지만 17세기 중반 대지진으로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유일하게 입구만 파괴되지 않아 1498년 제작된 피에타상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면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든 회랑과 정원이 나오고

 성 로브레와 성 블라디슬라브의 뼛조각이 보관되어 있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관광을 끝내고 성벽투어를 위하여 성곽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