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스플리트의 리바거리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1(2017.9.10)
스플리트(Split)의 현지인 로컬 가이드 HRVATSKI ENGELSKI 양의
미소띤 아름다운 모습
크로아티아에서는 단체관광객들에게는 현지인 로컬 가이드를 법적으로 유료로 쓰도록
하고 있는데 사실 이 들의 역활이란게 단체관광객 나라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탓에 별도움이 안되어 나와서 얼굴만 보이고 되돌아가는 역활로 끝난답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마담 정도의 역활 밖에는.......ㅎ
그래서 제가 이 아가씨한테 제 사진 모델이나 하고 가라고 하였더니 이 아가씨도
웃스운 표정으로 모델이 되어 주더군요.ㅋ
플리트비체를 돌아 본 후 근처의 작은 소도시에 있는 Macola 레스토랑에 진열된 박제 곰
레스토랑 홍보 장식용으로 구입한 박제곰인지 아니면 이지역에 살았던 곰의 박제인지는
잘 모르지만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기엔 아주 좋은.....ㅎ
플리트비체 근처의 도로변 풍경들
이제 아드리아해가 바라다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스플리트 근처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고속도로 주변 숲속에 난 산불 전경
이 곳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안가에도 가뭄이 심했던지 산불이 자주 나는 모양입니다.
이런 숲속에 올리브 농사를 짓는 농가들도 더러 보였는데 집근처까지 화마가 덮치는
모양새 같아서 안탑깝기만 하였습니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수도교 전경
스플리트 리바거리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지도
스플리트 표지판
스플리트는 이탈리아와 마주 보고 있는, 아드리아 해에 접한
달마티아 주의 주도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입니다.
3세기경 로마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 인근에서 태어났으며,
은퇴 후 여생을 즐길 장소로 고향이었던 스플리트를 택해 이곳에 궁전을 지었습니다.
스플리트 항구에서 바로 보이는 종탑이 인상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은
스플리트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스플리트는 수도인 자그레브보다도 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도시로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하는 요충지이며,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부터
달마티아 지방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로 개발되어 현대적인 항만 시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관광 중심 도시로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으며 흐바르 섬이나 트로기르,
시베니크 등 주변 도시들이 인접해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이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페리 노선이 가장 활발한 곳이 바로 스플리트로 주변의 섬들을 잇는 노선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와 연결하는 페리 노선도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특히 스플리트에서 흐바르 섬까지 이어 주는 노선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구간이라고 합니다.
라바거리 전경
스플리트 안내지도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의 옛모습
스플리트(Split)는 반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에 수심이 깊은 보호항이 있습니다.
아드리아 해변을 마주한 항구가 있는 스플리트는 지리적으로 북쪽으로 연결되는 훌륭한 철도와
도로 교통망이 결합되어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옛 시가지의 중심 부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5년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313년 사망하기까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거대한 이 궁전(295~305 세움)에는 바다를 향하는 두께 2m, 높이 22m의 벽과
북쪽을 향하는 높이 15m의 벽이 있습니다.
원래 이 궁전에는 4개의 성문과 16개의 탑이 있었는데, 그중 3개의 탑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옛날에는 아드리아 해의 파도가 남쪽 벽까지 밀려왔으나 이제는 야자수 가로수가 줄지어
심겨진 라바거리의 산책로로 하여 성벽까지 바닷물이 이르지 못합니다.
615년에 살로나이를 약탈한 아바르족이 이 궁전에도 피해를 입혔는데 당시
처음에 섬들로 피했으나 그후 620년경에 다시 돌아와 이 궁전을 피신처로 삼고
주거지를 스팔라툼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벽과 기둥들까지 포함하여 면적이 3ha인 궁전 안에 자신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이 궁전은 로마 시대의 궁전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된 것이며, 그리스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반씩 섞인 과도기적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이 궁전의 평면은 로마 시대의 야영지처럼 직4각형이고 4개의 길이 중앙에서 만나도록
설계되었으며, 길마다 거대한 아케이드가 늘어서 있습니다.
북쪽 끝에는 다수의 노예·하인·수비대를 위한 숙소가 있었으며 남쪽 끝에는
웅장한 아치형의 황실 거처와 집무실들이 있었습니다.
653년 이 시 최초의 주교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를 대성당으로 바꾸었는데 이 성당은
훌륭한 프레스코, 대리석으로 만든 설교단,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물로 유명합니다.
주피터 신전은 오래전에 세례당으로 바뀌었으며, 14, 15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종탑이 추가로 건설되었습니다.
이 궁전이 세워진 이래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해왔으며, 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중세·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건축물과 장식물들이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당국은 로마 시대의 유적들을 더 발굴하고 중세 초기의 유물들을 밝혀내기 위해서,
절충적인 양식의 건축물들과 현대적인 특색들을 보존하기 위해 힘써왔습니다.
지금도 주민들은 이 궁전을 박물관으로서가 아니라 시의 중심으로 여깁니다.
대성당과 세례당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기둥이 늘어선 중정(中庭)에는 카페가 있습니다.
로마 시대 양식의 아케이드에는 가게들이 즐비하며 궁전의 동문 바로
바깥쪽에는 이 시의 주요시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광객들은 시민들의 빨랫줄 아래를 거닐면서 로마 시대 및
그 이후 모든 시대의 건축유적을 보게 된답니다.
박물관으로는 크로아티아의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의 작품들을
전문적으로 소장한 박물관과 무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베네치아풍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시청사는 민속학 박물관으로 쓰입니다.
주(主)광장의 서쪽과 남쪽에는 중세에 옛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생긴,
미로처럼 얽힌 좁은 가로망이 있습니다.
벨프리 교회의 성모 마리아 종각(1100경)은 달마치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812년부터 이 도시는 비잔틴 제국의 주요도시로 발전했으며 베네치아(998)와 크로아티아(1069)에게
잠시 점령당한 후 1105년에 헝가리-크로아티아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했으며, 경쟁관계에 있는
트로기르와 가끔 싸웠습니다.
1420~1797년에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고 1797~1918년에는 오스트리아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통치기간중 1808~13년에는 잠시 프랑스에 넘어가기도 하였습니다.
1918년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 항만시설이 독일군과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옛 도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동서남북의 각 방향으로 금속의 이름을 붙인 문이 있습니다
동쪽에는 은문(Silver Gate), 서쪽에는 철문(Iron Gate), 남쪽에는 동문(Bronze Gate),
북쪽에는 금문(Golden Gate)이 있으며, 총 면적은 31,000m2에 이릅니다.
라바거리의 해변 전경
라바거리의 동문 지하 출입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지하의 통로 옆에는
관광기념품들을 파는 점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지 못하고
권력 투쟁에 휘말려 어지러운 말년을 보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황제들도
한동안 이곳을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는 길이나 광장 등이 만들어졌으며,
교회와 종탑 등이 추가로 건축되었습니다.
궁전의 중앙에는 열주 광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광장 옆의 기둥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며,
기둥을 세운 뒤 다시 석회암으로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으로 궁전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광장 양쪽에 있는 계단에 앉아 있으면 잠시나마
로마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됩니다.
광장은 궁전의 4개의 문을 통해 외부로 연결되는데 광장의 동쪽으로는
은문(Silver Gate)이 있으며 이 곳을 지나면 전통 시장을 만날 수 있고,
서쪽으로는 철문(Iron Gate)을 지나 나로드니 광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광장의 남쪽으로는 지하로 연결된 계단이 보이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지하 궁전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볼 수 있는데 이 통로는 현재 기념품 가게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동문(Bronze Gate)을 통해 항구가 보이는 해변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올라가면 좁은 골목을 지나 금문(Golden Gate)을 통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데, 문을 나서면 그레고리우스 닌의 거대한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문쪽의 지하궁전에 형성된 지하상가 전경
적벽돌을 이용한 천정 아치 축조 방식은 우리나라의 무령왕릉 축조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 제작 시기에 어떤 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성 도미누스 성당의 종탑(60m 높이의 로마네스양식)전경으로 종탑은
스플리트의 최고 전망대라고 합니다.
성 도미누스 성당은 황제의 영묘였었는데 중세 시대에 지오반니 라벤나 주교가
카톨릭 성당(성 도미누스 성당)으로 개조하였습니다.
황제가 자신을 주피터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만든 주피터 신전은 카톨릭 세레당으로
바뀌어졌는데 지금은 성도미누스 성당 내부 천정 돔 중간에 띠 장식으로 남아 있는
황제와 황비 프리스카의 부조만이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황제 자신이 그토록 가혹하게 탄압했던 카톨릭의 종교시설이 황제가 가장 소중스럽게
여겼던 것을 무너뜨리고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지하 무덤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의 시체가 알수는 없었겠지만, 역사의 아이러니 같아서 웃음이 나옵니다.
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며 아드리아해 연안지역에서
몇 안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꼽힙니다.
규모는 예상외로 작은 규모로 원래 3세기에 건축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영묘를
7세기에 대성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하여 처형된
성 도미누스에게 바쳐진 성당입니다.
열주광장에서 로마병사로 꾸민 스플리트 젊은이들이
여행객을 위하여 퍼포먼스를 하는 전경
성 도미누스 성당 출입문
이집트에서 가져온 스핑크스
황제의 알현실로 향하는 출입문 전경
황제의 거처로 향하는 출입구로 이 안에 알현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열주 광장 전경
스핑크스가 바라다 보이는 쪽이 성 도미누스 성당
열주광장 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풍운아로 원래 스플리트 부근 로마 식민지인 살로나의 하층민
계급 출신으로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로마군의 일개 사병으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운 덕에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경호대장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서기284년에 갑자기 죽자 부하들의 옹립으로 변방인
발칸반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역사에서 "군인황제시대"라고 불리워지는 혼란기로 즉 황제 자리는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센자가 황제가 되는 양육강식의 시대였다고 합니다.
이런 "군인 황제 시대"는 서기235년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하는 284년까지
50년간 지속되는데 장군출신 황제만 18명이나 나타났고 공동황제가 된 장군까지
합치면 26명이나 되었답니다.
배운 것은 없어도 군인으로서의 재능은 타고 났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힘으로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고 곳곳에 창궐한 이민족들을 몰아내어 로마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가혹한 그리스도교 박해자로 악명을 떨쳤는데 말 안듣는 신도들을
주로 사자우리에 던지는 등 잔혹하기가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05년 갑자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황제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암튼 로마역사에서 황제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은 그가 처음이였는데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은퇴 후에 이 곳 스플리트 궁전에서 채소 농사로
소일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재위 중에 스플리트에 황궁을 세우도록 명령을
내리고 궁전을 짓는데 나름대로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궁전 건설 작업은 295년부터 시작하였는데 그리스, 로마에서 가져 온 고급 대리석과 이집트에서
가져 온 스핑크스 등 돈을 물 쓰듯이 투자를 혔다고 합니다.
그가 스플리트를 황궁으로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고향 인근이라는 점과 당시 로마의
달마티아 통치의 중심지였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지붕이 없는 황제의 알현실 전경
알현실은 공명이 잘되는 탓에 이렇게 현재는 여행객들을 위한
퍼포먼스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지붕이 없어진 현재의 천정 전경
알현실을 빠져 나가면 황제가 머물렀던 거주공간으로 향하게 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성벽은 총길이가 215m인데,
아드리아 해와 맞닿은 쪽은 높이가 22m, 두께 2.1m에 이르며 북쪽면은 18m 높이로
이 성에는 16개의 탑과 4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북문은 포르타 아우레아, 동문은 포르타 아르겐테아, 서문은 포르타 페레아,
남문은 포르타 아이네아였습니다.
평면이 직4각형인 이 궁전은 마치 로마 병영처럼, 폭 11m인 4개의 아케이드 통로가
중앙에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황제의 거처는 궁전 남쪽을 차지한 2개의 4분(分) 구획지에 있고, 이 둘레를 따라 폭 7.3m,
길이 159m인 아케이드 회랑이 달마치야 해변과 바다쪽으로 개방되어 있는데, 산책과
예술품 전시에 이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피터 신전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영묘(7세기 뒤에 대성당으로 바뀜)는
황제의 거처가 있는 중정 안에 있었으며 손님이나 관리인들은 북쪽 지역에 있는
4분 구역지에 수용되었습니다.
공연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아카펠라 합창 단원들
알현실로 공연을 위하여 이동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민속공연단 단원들로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는 바람에 가까이에서 근접 촬영을 하다보니 얼굴만 크게 나오는......ㅎ
박물관 전경(유료)
리바거리 해안쪽 성벽 전경
가끔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객들의 돌출 행동이 눈에 보이는데 이 곳
스플리트에서도 그런 광경이 눈에 보여서 앵글에 담아 보았습니다.
황제의 거주공간 유적지 담벽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하여 포즈를 취하는 유럽여행객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런 돌출된 행동들은 질탄을 받을 일이겠지만,
이 곳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내부도 사람들이 사는 거주공간이라선지
이런 아가씨의 돌출 행동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행동으로.....ㅎ
암튼 제가 보기에 그런대로 봐줄만한 이쁜 아가씨인지라
길거리 모델 삼아 저도 앵글에 담아 봅니다. ㅎ
리바거리 해안쪽 성벽 전경
카메라를 들고 아가씨의 돌출 행동을 아름답게 바라다보는 유럽 중년
남자여행객의 표정이 재미가 있습니다.ㅎ
암튼 지구상의 남자들에게 이런 호사스런 눈요기는......ㅎ
주민들이 함께사는 궁전의 개인가옥들 전경
타일로 치장한 황제의 목욕탕 전경으로 이런 타일 바닥들은 로마시대 유적지에서 많이 보이는
전경들로 터키의 에페소스 귀족 거주지에서도 본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 도미누스 성당을 뒷 배경으로 둔 레스토랑 전경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곳이 바닷가 해안도시이다보니 일기 마져도 변화가 무쌍한.......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바람마져 부는 탓에 많은 비가 내리다보니
비를 피해야만하는 상황으로 바뀌어 갑니다.
서문쪽 전경으로 나로드리 광장쪽을 우산을 쓰고 성내를 돌아 보지만,
비바람이 몰아 치는 중인지라 ......쩝!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을 거듭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약 1700년의 역사가
숨 쉬는 공간으로, 1979년 유네스코는 궁전과 구시가지를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궁전을 중심으로 스플리트 관광의 주요 포인트가 몰려 있으며, 골목 구석구석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스플리트의 분위기를 충분히 맛보면서 여행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3000명 이상의 주민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므로
스플리트 사람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곳이기도 합니다.
서문 전경
비를 맞고 있는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
크로아티아에서는 가장 유명한 종교 지도자의 동상으로
다른 표기 언어로는 Grgur Ninski 라고 합니다.
열주 광장에서 북쪽으로 향하면 좁은 골목이 나오는데 이 골목을 지나면
금문(Golden Gate)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문을 통과하면 거대한 동상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 동상은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인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만든 그레고리우스 닌의 동상입니다.
그레고리우스 닌은 10세기경 활동했던 크로아티아의 주교로, 당시에 라틴어로만
보던 미사를 크로아티아어로도 볼 수 있도록 바티칸에 간청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가장 유명한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동상은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열주 광장 안에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로아티아를
점령했던 이탈리아 군대가 궁전 밖으로 동상을 옮겼고, 이후 금문 바깥에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상의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 때문에 관광객에게 더욱 유명해졌는데
스플리트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모두 한 번씩은 만진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기 때문에
엄지발가락 부분만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나 있습니다.
※ 찍은 사진이 많은 탓에 2편으로 나누워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