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명성황후를 그리다.(경복궁,건청궁내 곤녕합 2017.4.7)

뽀다구 2017. 5. 9. 09:01








명성황후 진영
















경복궁 흥례문 전경








관람코스 안내














한복을 곱게 입은 외국인들















모처럼 경복궁을 찾았습니다.


연휴기간 뮤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찾은 곳이지만 경복궁은 자주 찾아 왔었기에

 오늘은 경복궁 변두리 외곽 부분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생각입니다.

마침 건청궁에서 "명성 황후를 그리다"를 한다기에 것도 돌아볼 생각입니다.

요즘 한복을 입은 사람들은 고궁 입장료가 면제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고궁 나들이에

 고운 한복을 입은 처자들이 유독 많아 진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아 보입니다.


 경복궁 입장료도 3,000원이지만 지금은 내국인인 경우에는 50%를 활인하여

1,500원에 입장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근정전

















경회루


















하향정




















태원전 일원 (예전 청와대 경비대가 있던 곳)



























향원정




















건청궁 전경














명성황후 진영



명성황후의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로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습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는데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1873년(고종 10)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앞서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26일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습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양주 곧은골[直谷]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습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습니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습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습니다.


더욱이 3국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습니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라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으로 성씨인 민씨와

조선시대 왕의 부인인 왕비를 축약해 부르는 용어이며, 시해된 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습니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습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존영















금곡리 홍릉을 배경 화면으로 하고 앞에는 장미 꽃잎을 깔아 처연함을 나타낸......





1985년 10월 8일로 돌아가보는 시간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그려낸 깊은 슬픔이 서린 명성황후의 일생과 죽음















황후일 때의 일상을 그린 공간


















근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