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리 탄광촌 사택 벽화엔 고달펐던 광부들의 애증이 느껴진다.(2014.6.1)
채탄을 하다가 지쳐 잠시 먼 하늘을 바라다 보는 광부의 자화상
영월광업소 탄광촌 사택이었던 영월군 북면 마차리 하천길을 따라 들어 선
광부들의 줄집인 사택 담벼락엔 고달펐던 그 때 그 시절 그들 만의
애증이 그려진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1929년도 일제 총독부에 의하여 개발되기 시작하였던 영월광업소는
1935년 조선전력(주)에서 광업권을 등록 개발착수한 석탄광업소로
영월광업소에서 영월화력발전소간에 가공삭도를 이용하여 영월광업소에서
캔 석탄을 화력발전에 이용한 일제 수탈의 가장 대표적인 광산이기도 하였답니다.
1945년도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청 상무부 전기국 직활광업소로 운영되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임시휴광을 거쳐 1950년 대한 석탄공사 창립으로 광업권 및 운영권이
이관되어 1964년도에는 생산량이 30만톤에 이를 정도로 우리나라 기간산업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광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청정연료 사용증대와 연료전환정책에 따라
1987년10월 13일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 수립되면서 1988년도부터 한계 탄광을 통페합하는
단계에 이르러 불과 수 년만에 우리나라의 300여개에 달하는 탄광들이 문을 닫게 된답니다.
이에 따라 탄광지역은 급격한 인구 감소와 경제 위축은 주민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하였고,
1995년 2월엔 고한과 사북에서 대규모 주민시위가 발생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답니다.
하천변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마차리 광부 사택들 전경
마차철교 전경
오래 전 이곳은 검은 석탄물이 흐르던 하천이었으나
하천 정비로 인하여 이젠 그런 모습을 찾아 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광부들이 채굴한 석탄은 이렇게 삭도에 실려 영월화력발전소까지 운반되어
증기터빈을 돌리는 연료로 사용되었답니다.
따라서 일정시대엔 이 지역은 광산에서 급여가 나오는 날은
개들도 돈을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흥청거렸다고 합니다만,
이젠 이런 애증의 벽화가 그려진 작은 골목으로 나이드시고
병약한 노인네들만 남아 골목을 지킵니다.
영월광업소와 영월화력발전소가 가장 개발이 활발하였을 때에는
영월의 패션이 서울의 패션 일번지 명동 다음이었다면 이해가 가능하려는지요.
이 만큼 영월은 해방 후엔 대한중석 영월 상동광업소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있어서
기간산업의 중추적 소비도시였다는 역설적인 방증이기도 하답니다.
해방 후 남한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대다수와 그 당시 미국으로 전량 수출되었던 중석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외화수입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답니다.